올해는 과천이 시로 승격된 지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과천문화원’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9회에 걸쳐 시민과 함께하는 역사인문학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를 문원생활문화센터 관악홀에서 진행합니다. 강좌는 선사·고대부터 고려·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분야별 전문가가 과천의 역사·인물·문화유산을 짚습니다. 과천시니어신문은 보건복지부’노인자원봉사활성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매 강좌의 내용을 토대로 9회에 걸쳐 과천역사를 연재합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오늘을 함께 만들며 미래를 설계하는 과천 천년 역사 여행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공동취재]
현장강의 취재=김마리아·김수동·김인숙 기자
인터뷰 취재=송영운·이원호·양명업 기자
기자수첩=박창용·심일보·전승민 기자
[취재협조]
과천문화원 이정달 원장
[싣는 순서]
1회 고대사,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본 선사~고대의 과천 (김무중 교수, 9월 4일)
2회 추사 김정희와 과천 (김영복 감정위원, 9월 11일)
3회 고려시대, 과주(果州)의 탄생 (정요근 교수, 10월 2일)
4회 조선시대, 과천현 및 관료제도 (김문웅 교수, 10월 16일)
5회 최세진과 한글보급 (송철의 교수, 10월 23일)
6회 근현대사, 과천은 어떻게 과천시가 되었나? (최종고 교수, 10월 30일)
7회 정조와 과천 (이충구 교수, 11월 6일)
8회 삼국시대, 한강을 둘러싼 전쟁과 과천 (여호규 교수, 11월 13일)
9회 과천의 길, 사람, 문화유산 이야기 (이정찬 회장, 11월 20일)

우리가 날마다 쓰는 ‘기역·니은’ 같은 한글 자모 이름은 약 500년 전 조선의 역관이자 학자인 최세진이 펴낸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런 최세진의 산소가 과천에 있다는 사실은 그의 지석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과천문화원’은 지난 10월 23일 오후 2~4시 과천문화원 관악홀에서 시 승격 40주년 기념 역사인문학 특강 ‘2026 과천역사 바로 알기’의 다섯 번째 강좌를 열었다. 송철의 서울대 명예교수가 강사로 나서 ‘최세진과 한글 보급’을 주제로 강연했다.
송 교수는 강의를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했다. ‘기역, 니은’과 같은 자모 이름은 누가, 왜 그렇게 지었는지, 그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조선시대에는 어떤 교재로 한글을 가르쳤는지, 그리고 최세진(崔世珍)은 누구이며 한글·과천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다.
조선 최고의 중국어 통역관, 문과까지 합격하다
송 교수에 따르면, 최세진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업에 힘써 중국어(한어)와 이문(吏文)에 두루 능통했다. 이문은 중국과 주고받는 외교·행정 문서에 쓰던 독특한 한문 문체다. 그는 조선 최고의 중국어 역관이자 이문의 대가로 꼽혔다.
최세진은 임금 앞에서 통역하는 어전통사, 중국에 가서 의문 나는 점을 묻고 바로잡아 오는 질정관으로 여러 번 뽑혔다. 중국과 오가는 외교문서 작성도 사실상 전담하다시피 했다. 역관을 뽑는 역과(譯科)와 문관을 뽑는 문과(文科)에 모두 합격해 역관이면서 문신(文臣)이기도 했다.
품계는 종2품까지 올랐지만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통역과 외국어 교육을 맡은 사역원, 외교문서를 다루던 승문원에서 일했다. 중국어와 이문 학습서도 직접 저술해 관련 교재를 완비하는 등 교육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중종실록’ 37년(1542년) 2월 10일 자에 최세진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있지만, 태어난 해나 사망 당시 나이는 적혀 있지 않아 논란이 많았다. 그러다 과천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1542년 75세에 병으로 사망했다(年至七十五 嘉靖 壬寅 以疾 終)”는 기록이 나왔다. 이를 거꾸로 계산하면 최세진은 1468년에 태어났다.
신분을 두고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역관 집안의 중인 출신으로 보는 견해다. 조선 후기에는 역관이 모두 중인이었고, 최세진의 아버지도 역관이었으며, 통역 일이 집안의 가업이었다는 기록이 근거다. 다른 하나는 한미하긴 했지만 양반 출신이라는 견해다. 문과에 급제해 문신으로 대우받았고, 최세진이 살던 시대까지는 중인 계급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한글·중국어·이문, 세 분야에 남긴 17권
최세진은 한글(과 국어), 중국어, 이문 세 분야에 걸쳐 모두 17권의 책을 남겼다. 한글 분야의 대표작은 ‘훈몽자회(訓蒙字會)’, 중국어 분야는 ‘번역노걸대’·’번역박통사’·’사성통해’, 이문 분야는 ‘이문집람’이다.
‘번역노걸대’와 ‘번역박통사’는 중국어 회화책이다. 고려 말부터 전해 오던 ‘노걸대’와 ‘박통사’에 우리말 번역을 붙이고, 한자마다 중국 발음을 한글로 달았다. ‘노걸대’는 고려 상인이 북경까지 가는 길에 필요한 회화를, ‘박통사’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회화를 담았다. 송 교수는 한글만 알면 누구나 스스로 중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한 책이라며, 중국어와 우리말, 중국 한자음에 해박해야 가능한 굉장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두 책은 16세기 초 중국어 구어(口語)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자, 중국에도 없는 중국 한자음 자료이기도 하다.
‘사성통해’는 신숙주가 엮은 ‘사성통고’를 보완한 운서다. 한자를 운(韻)별로 나누고 중국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해, 16세기 중국어 발음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중국어 학습을 돕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문집람’은 이문에서 어려운 어구를 골라 풀이한 책이다. 최세진은 이 밖에도 ‘이문속집람’·’우공주의집람’·’박고집람’·’주의택고집람’을 펴내 이문 참고서를 완비했다.
어린이 한자책에 실린 한글 교재, ‘언문자모’
최세진은 당시 기초 한자 학습서였던 ‘천자문’과 ‘유합’에 문제가 많다고 비판했다. ‘천자문’은 문장은 훌륭하지만 중국 고사(故事) 위주여서 어린이에게 내용이 어렵고 어려운 한자도 많았다. ‘유합’은 어린이에게 사물의 이름처럼 뜻이 분명한 실자(實字)부터 가르쳐야 하는데, 문법적 구실을 하는 허자(虛字)가 많았다.
그래서 실자 위주의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직접 편찬했다. ‘훈몽자회’는 ‘어린이에게 가르칠 한자를 모은 책’이라는 뜻으로, 1527년(중종 22년)에 나왔다. 한자 3360자를 싣고 글자마다 음과 뜻(훈)을 달았다.
최세진은 어린이들이 쉬운 한글을 먼저 익힌 뒤 이 책으로 공부하면 스승 없이도 한자를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에 따라 책의 ‘범례’ 끝에 한글 학습 교재인 ‘언문자모(諺文字母)’를 실었다. 송 교수는 ‘훈몽자회’ 하면 흔히 ‘언문자모’와 한글을 떠올리지만, 수천 개의 우리말 어휘를 한데 모은 16세기 국어 어휘의 보고(寶庫)로서 국어학적 가치도 높다고 강조했다. 당시로서는 견줄 만한 국어 어휘집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기역·니은’이 처음 세상에 나오다
‘언문자모’는 한글의 자모 체계와 각 자모의 소리값, 쓰는 법을 짧고 요령 있게 정리한 교재다. 앞부분은 자모를, 뒷부분은 소리의 높낮이를 다룬다. 자모 부분은 ‘초성종성통용8자’, ‘초성독용8자’, ‘중성독용11자’, ‘초중성합용작자례’, ‘초중종3성합용작자례’ 등 5개 항으로 이뤄졌다.
첫소리와 받침에 모두 쓰는 ‘초성종성통용8자’에는 두 글자 이름이 붙었다. ㄱ 기역(其役), ㄴ 니은(尼隱), ㄷ 디귿(池末), ㄹ 리을(梨乙), ㅁ 미음(眉音), ㅂ 비읍(非邑), ㅅ 시옷(時衣), ㆁ 이응(異凝)이다. 첫소리에만 쓰는 ‘초성독용8자’는 ㅋ 키(箕), ㅌ 티(治), ㅍ 피(皮), ㅈ 지(之), ㅊ 치(齒), ㅿ ᅀᅵ(而), ㅇ 이(伊), ㅎ 히(屎)처럼 한 글자 이름이었다. 자모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이 대목 덕분에 ‘훈몽자회’와 최세진이 널리 알려졌다.
자모의 순서도 새로 짰다. ‘훈민정음’은 ㄱ ㅋ ㆁ ㄷ ㅌ ㄴ ㅂ ㅍ ㅁ ㅈ ㅊ ㅅ ㆆ ㅎ ㅇ ㄹ ㅿ, ㆍ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순서였다. ‘언문자모’는 이를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ㅋ ㅌ ㅍ ㅈ ㅊ ㅿ ㅎ,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ㆍ 순서로 바꿨다. 오늘날 우리가 외우는 순서와 거의 같다.
모든 자음 이름이 두 글자가 된 것은 1909년 ‘국문연구의정안’에서다. 모든 자음자를 받침으로 써야 한다는 주시경의 주장이 반영돼 이응·기윽·니은·디읃·리을·미음·비읍·시읏·지읒·히읗·키읔·티읕·피읖·치읓으로 정했다. 자모의 순서와 이름이 지금처럼 확정된 것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다. 제4항은 한글 자모를 24자로 하고 ㄱ(기역)·ㄴ(니은)·ㄷ(디귿)·ㄹ(리을)·ㅁ(미음)·ㅂ(비읍)·ㅅ(시옷)·ㅇ(이응)·ㅈ(지읒)·ㅊ(치읓)·ㅋ(키읔)·ㅌ(티읕)·ㅍ(피읖)·ㅎ(히읗), ㅏ(아)·ㅑ(야)·ㅓ(어)·ㅕ(여)·ㅗ(오)·ㅛ(요)·ㅜ(우)·ㅠ(유)·ㅡ(으)·ㅣ(이)로 정했다.
‘언문자모’는 글자를 조합하는 방법도 알려 준다. 첫소리 ㄱ(其)과 가운뎃소리 ㅏ(阿)를 합하면 ‘가’가 되는데 이는 ‘家’의 음이고, 여기에 받침 ㄱ(役)을 더하면 ‘各’의 음인 ‘각’이 된다. 받침까지 합친 예로는 간(肝)·갇(笠)·갈(刀)·감(枾)·갑(甲)·갓(皮)·강(江)을 들었다. 첫소리 16자와 가운뎃소리 11자를 짝지으면 ‘가·갸’와 같은 글자 176자가 만들어진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반절표 한 장으로 누구나 한글을
송 교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글 교재로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언해본, ‘언문자모’, 반절표 네 가지를 꼽았다. 해례본의 본문은 세종대왕이 직접 쓴 ‘서문’과 ‘예의’로 이뤄졌다. ‘예의’에는 새로 만든 28자의 예시와 소리값, 간단한 운용법이 담겼지만 교재로 쓰기에는 조금 어렵고 내용이 지나치게 간단했다. 본문만 우리말로 풀어 쓴 언해본은 조금 쉬워졌지만 역시 내용이 짧았다.
‘언문자모’는 ‘예의’의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 소리값을 고려해 자모 순서를 다시 배열했고, 자음자를 ‘초성종성통용8자’와 ‘초성독용8자’로 나눠 받침을 8자로 제한하는 ‘8종성법’을 담았다. 글자를 합치는 방법도 간명하게 정리했다. 다만 모든 내용이 한문으로 쓰여 처음 배우는 사람은 다가가기 어려웠다.
이 한계를 넘어선 것이 반절표다. 반절표는 첫소리 글자와 가운뎃소리 글자를 합친 모든 글자, 그리고 받침으로 쓰는 8글자를 한 장의 도표처럼 늘어놓은 것이다. 복잡한 설명이 없어 처음 배우는 사람도 쉽게 익힐 수 있었고, 그 원형은 이미 ‘언문자모’에 암시돼 있었다.
반절표 학습은 받침으로 쓰이는 8자의 이름과 ‘가’행부터 ‘하’행까지의 글자를 외우는 데서 시작했다. 그다음 “’가’에 ‘ㄱ(기역)’ 하면 ‘각’이요, ‘가’에 ‘ㄴ(니은)’ 하면 ‘간’이요” 하는 식으로 받침법을 가르쳤다.
반절표는 시대에 따라 진화했다. 처음 쓰인 ‘14행 8종성 반절표’로는 ‘개·게’ 같은 글자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받침 줄에 ‘ㅣ’를 추가한 ‘14행 9종성 반절표’가 나왔고, “’가’에 ‘ㅣ’ 하면 ‘개’요”처럼 가르쳤다. 이 표로도 ‘과·궈·곽·괘’는 만들 수 없어 ‘과·궈’ 행을 더한 ‘16행 9종성 반절표’가 등장했다. 이 표에서는 “’과’에 ‘ㄱ’ 하면 ‘곽’이요, ‘과’에 ‘ㅣ’ 하면 ‘괘’요” 하는 식으로 글자를 익혔다.
송 교수에 따르면, 반절표를 고치고 다듬으며 받침법을 개발한 덕분에 반절표 한 장만으로도 한글 교육이 거의 완벽하게 이뤄지게 됐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한글을 깨칠 수 있었고, 이것이 한글이 널리 보급된 바탕이 됐다. 송 교수는 우리 선조들이 한글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쉽고 간단한 교재와 교육 방법을 개발하려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반절표를 쉽게 외우도록 ‘언문(국문) 뒷풀이’라는 노래도 만들어졌다. “기역니은디귿리을 기역자로 집을 짓고 지긋지긋이 살쟀더니, 가갸거겨 가이없는 이내 몸이 그지없이도 되었구나”처럼 반절표 순서에 맞춰 가사를 붙인 노래다.
‘맞춤법 혼란의 주범’이라는 누명
최세진은 한때 맞춤법 혼란의 장본인으로 비판받았다. 1894년 고종의 칙령으로 한글은 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다. 중국 연호 사용을 멈춘 것은 정치적 독립을, 공문서에 한글을 쓰기로 한 것은 문화적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문서와 교과서에 한글을 쓰려 하니 맞춤법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문자는 계몽과 교육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만큼, 당시 선각자들은 맞춤법 통일을 나라의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어문을 정리하고 맞춤법을 통일하려는 ‘어문운동’이 일어났고, 가장 크게 활약한 인물이 주시경이다. 주시경은 우리말 문법을 연구해야 맞춤법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문법에 맞는 맞춤법을 주장했다.
전통적인 맞춤법은 ‘놉고·놉지·노파·노프면’, ‘집과·집도·지비·지브로’처럼 소리 나는 대로 이어 적는 방식(연철)이었다. 주시경은 ‘높고·높지·높아·높으면’, ‘집과·집도·집이·집으로’처럼 낱말의 원형을 고정해 끊어 적는 방식(분철)을 주장했다. 당시에는 ‘노프면·놉흐면·놉프면’, ‘지비·집비·집이’처럼 여러 표기가 뒤섞여 있었다.
주시경은 이런 혼란이 ‘8종성법’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세종은 ‘훈민정음’ ‘예의’에서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終聲復用初聲)”며 모든 첫소리 글자를 받침에도 쓰게 했는데, ‘훈몽자회’의 ‘언문자모’에 이르러 받침을 8자로 제한했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8종성법을 만든 최세진에게 맞춤법 혼란의 책임이 있다고 크게 비판했고, 이 인식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반전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일어났다. 해례본 ‘종성해’에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여덟 자면 받침으로 충분히 쓸 수 있다(然ㄱㆁㄷㄴㅂㅁㅅㄹ八字可足用也)”는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8종성법은 최세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해례본에 이미 있던 규정이었다. 이 규정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450여 년 동안 한글 표기를 지배했고, 그 결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해례본 발견으로 최세진은 누명을 벗었다. 오히려 한글 자모 이름을 처음 지었다는(또는 제시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송 교수는 ‘언문자모’가 훌륭한 한글 교재이고, 여기서 나온 반절표는 더 쉽고 간단해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므로 그 공의 일부는 최세진에게 있다고 봤다. 다른 업적에 대한 연구도 진척되면서 그가 대단한 학자였다는 점이 부각됐고, 최세진은 1999년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과천, 최세진의 연고지가 되다
최세진은 중국어와 이문에 탁월한 조선 최고의 역관이었고, 대과에 급제해 종2품까지 올랐다. 그럼에도 출생 연도와 가계, 출생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송 교수는 그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이런 사정 탓에 최세진에게는 연고지가 없었고, 그를 내세우는 지역이나 지자체도 없었다.
상황을 바꾼 것이 과천에서 나온 지석이다. 지석은 1980년대 초 발견됐고, 1999년 11월 공개됐다. 지석에는 최세진이 75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산소가 과천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 지석의 발견으로 과천은 최세진의 연고지가 됐고, 과천 중앙공원에는 ‘한글학자 최세진 기념비’가 세워졌다.
[인터뷰] “반절표 한 장만으로도 한글 교육이 거의 완벽하게 이뤄졌다”
송철의 서울대 명예교수
송철의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세진이 ‘훈몽자회’에 실은 ‘언문자모’에서 ‘기역·니은’ 같은 한글 자모 이름이 처음 등장했고, 여기서 나온 반절표가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으로 최세진이 맞춤법 혼란의 장본인이라는 누명을 벗었다고 설명했다.

송철의 교수는 지난 10월 23일 ‘과천문화원’의 시 승격 40주년 기념 특강 ‘2026 과천역사 바로 알기’ 다섯 번째 강좌에서 ‘최세진과 한글 보급’을 주제로 강연했다. 송 교수의 강의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Q. 최세진은 어떤 인물인가.
A.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업에 힘써 중국어와 이문에 능통했다. 조선 최고의 중국어 역관이자 이문의 대가였다. 어전통사와 질정관으로 여러 번 뽑혔고, 중국과의 외교문서 작성을 거의 전담했다. 역과와 문과에 모두 합격해 역관이면서 문신이었고, 품계는 종2품에 이르렀다. 평생 사역원과 승문원에서 일하며 한글·중국어·이문 세 분야에 17권의 책을 남겼다.
Q. 태어난 해가 오랫동안 논란이었다고 들었다.
A. ‘중종실록’ 37년(1542년) 2월 10일 자에 별세 기사는 있지만 태어난 해나 사망 당시 나이는 없다. 그런데 과천에서 발견된 지석에 1542년 75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어, 거꾸로 계산하면 1468년생이 된다.
Q. ‘훈몽자회’는 어떤 책인가.
A. 어린이에게 가르칠 한자를 모은 학습서로, 한자 3360자에 음과 뜻을 달았다. 최세진은 ‘천자문’이 중국 고사 위주라 어린이에게 어렵고, ‘유합’은 허자가 많다고 비판하며 실자 위주로 이 책을 엮었다. 어린이가 쉬운 한글을 먼저 배우면 스승 없이도 한자를 익힐 수 있다고 보고 ‘범례’ 끝에 ‘언문자모’를 실었다. 수천 개의 우리말 어휘를 모은 16세기 국어 어휘의 보고이기도 하다.
Q. ‘언문자모’에서 무엇이 새로웠나.
A. 자모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받침에도 쓰는 8자에는 ‘기역(其役)·니은(尼隱)’처럼 두 글자 이름을, 첫소리에만 쓰는 8자에는 ‘키(箕)·티(治)’처럼 한 글자 이름을 붙였다. 자모 순서도 소리값을 고려해 다시 배열했고, 자음을 둘로 나눠 받침을 8자로 제한하는 ‘8종성법’을 담았다. 글자를 합치는 방법도 간명하게 정리했다.
Q. 오늘날의 자모 이름과 순서는 언제 정해졌나.
A. 모든 자음 이름이 두 글자가 된 것은 1909년 ‘국문연구의정안’이다. 모든 자음자를 받침으로 써야 한다는 주시경의 주장이 반영됐다. 순서와 이름이 지금과 같이 확정된 것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4항으로, 자모를 24자로 정했다.
Q. 조선시대에는 한글을 어떻게 가르쳤나.
A.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언문자모’, 반절표가 교재로 쓰였다. 해례본은 조금 어렵고 내용이 지나치게 간단했으며, 언해본도 내용이 짧았다. ‘언문자모’는 한문으로 쓰여 입문자가 다가가기 어려웠다. 반절표는 첫소리와 가운뎃소리를 합한 모든 글자와 받침 8자를 도표처럼 나열해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받침 8자의 이름과 ‘가’행부터 ‘하’행까지 외운 뒤 “’가’에 ‘ㄱ(기역)’ 하면 ‘각’이요” 하는 식으로 받침법을 배웠다.
Q. 반절표는 어떻게 발전했나.
A. ‘14행 8종성 반절표’로는 ‘개·게’를 만들 수 없어 받침에 ‘ㅣ’를 더한 ‘14행 9종성 반절표’가 나왔다. 이 표로도 ‘과·궈·곽·괘’가 안 돼 ‘과·궈’ 행을 추가한 ‘16행 9종성 반절표’가 등장했다. 반절표를 고치고 받침법을 개발한 결과, 반절표 한 장만으로도 한글 교육이 거의 완벽하게 이뤄졌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한글을 익힐 수 있었고, 외우기 쉽도록 ‘언문 뒷풀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었다. 선조들은 한글 창제에 그치지 않고 쉬운 교재와 교육법을 개발하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Q. 최세진은 왜 맞춤법 혼란의 장본인으로 비판받았나.
A. 1894년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됐지만 맞춤법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주시경은 그 원인을 8종성법에서 찾았다. 세종은 모든 초성을 종성에도 쓰라고 했는데 ‘훈몽자회’에서 8종성법이 생겼다고 보고, 최세진을 크게 비판했다. 이 인식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러나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해례본 ‘종성해’에 받침은 8자면 충분하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발견으로 최세진은 누명을 벗었고, 1999년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Q. 최세진과 과천은 어떤 인연이 있나.
A. 최세진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출생 연도·가계·출생지 기록이 없고, 연고지도 내세우는 지자체도 없었다. 그러다 1980년대 초 과천에서 지석이 발견돼 1999년 11월 공개됐다. 지석에 75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산소가 과천이라고 적혀 있어, 과천이 그의 연고지가 됐다. 과천 중앙공원에는 ‘한글학자 최세진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자수첩] ‘기윽’ 아닌 ‘기역’, 그 답은 과천에 잠든 최세진에게 있다
ㄴ은 ‘니은’, ㄹ은 ‘리을’, ㅁ은 ‘미음’인데 왜 ㄱ만 ‘기윽’이 아니고 ‘기역’일까. ㄷ은 왜 ‘디읃’이 아닌 ‘디귿’, ㅅ은 ‘시읏’이 아닌 ‘시옷’일까. 학교에서 한 번쯤 품어 봤을 이 질문의 답은 약 500년 전 과천에 묻힌 한 학자에게 닿아 있다.
지난 10월 23일 ‘과천문화원’의 ‘2026 과천역사 바로 알기’ 다섯 번째 강좌에서 송철의 서울대 명예교수가 소개한 ‘언문자모’를 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최세진은 1527년 펴낸 어린이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 앞부분에 이 한글 교재를 실으면서 자음마다 한자로 이름을 붙였다. ㄴ은 니은(尼隱), ㄹ은 리을(梨乙), ㅁ은 미음(眉音), ㅂ은 비읍(非邑)이다.
규칙은 단순하다. 앞 글자에서는 그 자음이 첫소리로, 뒤 글자에서는 받침으로 쓰인다. ‘니(尼)’의 ㄴ은 첫소리, ‘은(隱)’의 ㄴ은 받침이다. 이름만 불러도 그 글자가 처음과 끝 어디에 쓰이는지 알려 주는 셈이다.
문제는 ㄱ·ㄷ·ㅅ이었다. 받침 자리에 들어갈 ‘윽·읃·읏’ 소리를 가진 한자가 없었다. 그래서 ㄱ에는 소리가 비슷한 ‘역(役)’을 붙여 ‘기역’이 됐다. ㄷ과 ㅅ에는 아예 한자의 뜻을 빌렸다. ‘훈몽자회’ 원문을 보면 ‘末’과 ‘衣’ 둘레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데, 소리가 아닌 뜻으로 읽으라는 표시다. ‘末(끝)’의 옛말 ‘귿’을 빌린 ‘디귿’, ‘衣(옷)’를 빌린 ‘시옷’이 그렇게 태어났다.
이 이름이 끝까지 순탄하게 이어진 것은 아니다. 1909년 ‘국문연구의정안’은 주시경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윽·디읃·시읏’으로 규칙을 맞췄다. 하지만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다시 ‘기역·디귿·시옷’을 택했다. 오늘 우리가 쓰는 이름은 결국 최세진이 붙인 이름 그대로다.
최세진에게는 억울한 시절도 있었다. 주시경과 그 제자들은 받침을 8자로 묶은 ‘8종성법’이 맞춤법을 어지럽혔다며 그를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이 누명은 194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고, 거기에 이미 ‘받침은 여덟 자면 충분하다’는 규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야 벗겨졌다.
더 오래 잊혀 있던 것은 그의 고향과 무덤이었다. 집안이 한미해 출생지도 가계도 기록에 남지 않았고, 그를 기리는 지역도 없었다. 1980년대 초 과천에서 지석이 발견되고 1999년 11월 공개되면서, 최세진이 75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과천에 묻혔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졌다. 그해 그는 문화인물로 선정됐고, 과천 중앙공원에는 ‘한글학자 최세진 기념비’가 섰다.
기념비는 지금도 중앙공원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다. 과천에 사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 그 앞에 서서 비문을 읽어 보길 권한다. 휴대전화 자판으로 ‘ㄱ’을 누를 때마다, 그 글자를 ‘기역’이라 부르게 한 사람이 바로 이 동네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반절표로 한글을 익힌 옛사람들은 “기역니은디귿리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글자를 외웠다. 과천이 최세진의 연고지가 된 지 30년이 다 돼 간다. 이제 과천이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줄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