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역사 바로알기 ②] 추사 김정희, 과천서 마지막 붓 들다

올해는 과천이 시로 승격된 지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과천문화원’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9회에 걸쳐 시민과 함께하는 역사인문학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를 문원생활문화센터 관악홀에서 진행합니다. 강좌는 선사·고대부터 고려·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분야별 전문가가 과천의 역사·인물·문화유산을 짚습니다. 과천시니어신문은  보건복지부’노인자원봉사활성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매 강좌의 내용을 토대로 9회에 걸쳐 과천역사를 연재합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오늘을 함께 만들며 미래를 설계하는 과천 천년 역사 여행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공동취재]
현장강의 취재=김수동·김마리아·김인숙 기자
인터뷰 취재=송영운·이원호·전승민 기자
기자수첩·사진촬영=박창용·심일보·양명업 기자

[취재협조]
과천문화원 이정달 원장

[싣는 순서]

1회 고대사,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본 선사~고대의 과천 (김무중 교수, 9월 4일)
2회 추사 김정희와 과천 (김영복 감정위원, 9월 11일)
3회 고려시대, 과주(果州)의 탄생 (정요근 교수, 10월 2일)
4회 조선시대, 과천현 및 관료제도 (김문웅 교수, 10월 16일)
5회 최세진과 한글보급 (송철의 교수, 10월 23일)
6회 근현대사, 과천은 어떻게 과천시가 되었나? (최종고 교수, 10월 30일)
7회 정조와 과천 (이충구 교수, 11월 6일)
8회 삼국시대, 한강을 둘러싼 전쟁과 과천 (여호규 교수, 11월 13일)
9회 과천의 길, 사람, 문화유산 이야기 (이정찬 회장, 11월 20일)

조선 후기 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생의 마지막 4년을 과천에서 보냈다. 예서·전서·해서·행서·초서 다섯 서체를 하나로 녹여 낸 ‘추사체’는 연경에서 얻은 배움과 두 차례의 유배, 그리고 과천 시절의 원숙함 속에서 완성됐다.

‘과천문화원’은 지난 9월 11일 오후 2~4시 문원생활문화센터 관악홀(과천문화원 지하 1층)에서 시 승격 40주년 기념 역사인문학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의 두 번째 강좌를 열었다. 강사로 나선 김영복 ‘TV쇼 진품명품’ 고서·서예 감정위원은 ‘추사 김정희와 과천’을 주제로 추사의 가문과 연보, 경학과 서학을 차례로 짚었다.

김 위원은 강의 첫머리에서 추사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넓혀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경학과 시문, 글씨를 같이 보면 추사의 전면을 보는 것이요, 글씨만 보면 추사의 일부를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추사가 글씨 잘 쓰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경전을 연구한 학자이자 시인이었다는 뜻이다.

왕실과 이어진 명문가의 자손

추사는 경주 김씨 상촌파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의자료에 따르면, 이 집안은 상촌 김자수(1351~)에서 시작해 김홍욱, 김흥경(1677~1750), 김한신(1720~1758), 김이주(1730~1797), 김노경(1766~1837)을 거쳐 추사로 이어진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한 월성위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1745~1805)와 그 아버지 김한구(1723~1769), 김구주(1740~1786)·김관주(1749~1806)도 같은 경주 김씨 집안 인물이다.

할아버지 김이주에게는 노영·노성·노명·노경 네 아들이 있었다. 추사는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집안의 대를 이었다. 친동생으로는 명희와 상희가 있다. 훗날 추사도 1841년 상무를 양자로 들였고, 서자로 상우를 두었다.

추사는 1786년 6월 3일 태어났다. 열다섯 살이던 1800년 한산 이씨와 혼인했지만 1805년 부인을 먼저 떠나보냈고, 1808년 예안 이씨와 다시 혼인했다. 예안 이씨는 추사가 제주에 유배 중이던 1842년 세상을 떠났다.

석 달의 연경행, 10년 유학보다 컸다

추사의 삶을 바꾼 것은 청나라 연경(지금의 베이징) 여행이었다. 1809년 10월 28일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동지 무렵 청나라에 보내는 사신단의 부사)로 떠날 때, 스물네 살의 추사는 자제군관(사신의 자제가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가는 자리)으로 함께 길을 나섰다. 같은 해 11월 9일에는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듬해인 1810년, 스물다섯 살의 추사는 북경에서 담계 옹방강(1733~1818)과 운대 완원(1764~1849)을 스승으로 만났다.

김 위원은 “아버지의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3개월간 다녀온 것이 다른 사람의 10년 유학 기간보다 그의 생애에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그전까지 추사는 집안 어른들에게 배우는 가학으로 공부했지만, 두 스승과 그 제자들을 만나면서 학문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졌다. 글씨에도 다른 차원의 공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이때다. 돌아온 뒤 한동안은 옹방강 풍의 행서와 해서를 쓰면서, 연경에서 보고 들은 것을 소화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공부에 매달렸다.

귀국 뒤 추사의 학문과 벼슬길은 순조로웠다. 1815년 초의 스님(1786~1866)을 만났고, 1816년에는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했다. 1818년 스승 옹방강이 세상을 떠났고, 추사는 1819년 문과에 급제했다. 1826년 6월 25일에는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돼 비인현감 김우명을 봉고파직(관아 창고를 봉하고 파면함)했다.

1829년에는 또 다른 스승 완원이 엮은 ‘황청경해’가 173종 1408권 360책으로 완간됐다. 이 책은 1832년 역관 이상적을 통해 추사에게 전해졌다. 1836년 추사는 정3품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같은 해 2월 22일에는 정약용이 세상을 떠났다.

탄핵과 유배, 시련이 길러 낸 글씨

영광 뒤에는 시련이 이어졌다. 1830년 8월 27일, 추사에게 봉고파직을 당했던 김우명이 부사과가 돼 김노경을 탄핵했다. 익종의 대리청정 시기에 권신 김로(1783~)에게 아부했다는 죄목이었다. 같은 무렵 윤상도(1768~1840)는 호조판서 박종훈(1773~1841), 전 유수 신위(1769~1845), 어영대장 유상량(1764~) 등을 탐관오리로 몰아 탄핵했다. 1837년 3월 30일 생부 김노경이 세상을 떠났고, 1838년 8월에는 훗날 추사의 대표 제자가 되는 소치 허련(1809~1892)이 월성위궁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840년은 추사 인생의 가장 큰 고비였다. 6월 동지부사에 임명됐지만, 7월 10일 김홍근(1788~1842)이 윤상도의 옥사를 다시 꺼내 들며 이미 세상을 떠난 김노경을 탄핵했다. 7월 12일 김노경의 관직이 추탈(죽은 뒤 관직을 빼앗음)됐고, 예산 고향 집에 머물던 추사는 8월 25일 서울로 잡혀 왔다. 그리고 9월 2일 제주도에 위리안치(가시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에 가둠)됐다.

제주 유배는 8년 넘게 이어졌다. 그사이 1844년 추사는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보냈다. 1848년 12월 6일 유배에서 풀려나 이듬해 1월부터 서울 용산 강가에서 지냈지만, 1849년 6월 6일 헌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다시 나빠졌다. 1851년 7월 22일, 사도세자의 형인 추존왕 진종의 신위를 옮기는 문제에 휘말려 권돈인은 순흥으로, 추사는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다.

1852년 8월 13일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과천 과지초당에 머물렀고, 1856년 10월 10일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857년 4월 3일 김노경의 관직이 회복됐고, 같은 해 6월에는 추사의 관직도 되돌려졌다.

김 위원은 추사의 학문을 이해하려면 유학의 흐름부터 알아야 한다고 했다. 유학은 오경과 ‘논어’·’효경’을 중심으로 한 원시유학에서 출발해, 한나라의 한학(글자의 뜻을 풀이하는 훈고학), 송나라의 송학(성리학, 양명학도 그 별종), 청나라의 청학(고증학)으로 흘러왔다. 고증학은 증거를 따져 옛 사실을 밝히는 학문이고, 그 방법으로 비석이나 쇠붙이에 새긴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 금석학이다.

추사의 학문도 이 흐름을 따라 바뀌었다. 1810년까지는 성리학을 공부했고, 1840년까지는 성리학과 한학을 절충했으며, 1841년 이후에는 고증학에 몰두했다. 북한산 순수비를 찾아낸 것도 고증학과 금석학의 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문에서는 시인의 타고난 성정과 감흥을 중시하는 성령설을 따랐다.

다섯 서체를 하나로, 추사체의 비밀

김 위원은 추사의 글씨 공부를 다섯 단계로 나눴다. 1810년까지는 집안에서 안진경·구양순체를 익혔고, 1810년부터 1825년까지는 옹방강의 글씨와 한나라 비석 글씨를 공부했다. 1825년부터 1840년까지가 추사체의 초기, 1840년부터 1849년까지가 완숙기다. 1850년부터 세상을 떠난 1856년까지는 글씨가 삼차원에 이른 ‘별격’의 시기로 봤다.

흔히 추사의 글씨는 세 시기로 나뉜다. 24세까지의 습작기, 연경에 석 달 다녀온 뒤부터 55세에 제주로 유배 갈 때까지, 그리고 제주 유배와 방환(유배에서 풀려 돌아옴), 북청 유배를 거쳐 과천에서 71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다. 보통은 세 번째 시기의 글씨를 추사체라 부른다. 하지만 김 위원은 생각이 다르다. 말년의 글씨는 처음 글씨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고졸(예스럽고 꾸밈없음)하기 때문에, 중국에 다녀온 뒤 달라지기 시작한 글씨부터 약 10년을 연습기로 보고 그 뒤를 추사체라 부르는 편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제주 유배 이후 추사는 중국과 조선 글씨의 장점을 모두 살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획을 더해, 누구도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글씨를 만들어 냈다.

추사 글씨의 가장 큰 장점은 대자(큰 글씨)에 있다. 김 위원은 “이런 대자 글씨는 그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아직 없으며, 중국이나 일본에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큰 글씨를 작게 줄여 보면 원래의 맛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한 작품을 쓸 때마다 전체 크기에 맞는 구도를 미리 잡고 썼다는 증거이며, 오늘날의 공간 개념을 그 시대에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서체 사이의 긴밀한 관계도 추사 글씨의 특징이다. 예서 한 자를 쓰더라도 그 안에 전서·행서·해서의 기운을 충분히 보태 끝없는 변화를 꾀했다. 청나라의 김농과 정판교도 비슷한 풍을 좇았지만, 다섯 서체의 융합과 글자의 강약·대소가 자유자재로 스며 녹아 있는 글씨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획이 추사의 창작은 아니다. 그 근거는 모두 중국 역대 금석문 속에 들어 있다. 추사 글씨를 볼 때는 글자 전체의 짜임새, 곧 공간 구성을 봐야 한다. 강과 약, 대와 소, 비(굵음)와 수(가늚), 장과 단이 빈틈없이 어울리면서도 답답하거나 어색한 느낌이 전혀 없을 때, 비로소 추사 글씨를 온전히 감상한 것이다.

파세 없는 글씨, 봉은사 ‘판전’

추사는 모든 서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 독특한 서체를 이뤘다. 특히 예서로 쓴 가로 현판(횡액)과 대련(한 쌍의 대구 글씨)은 중국에서도 짝을 찾기 어렵다고 중국인들까지 말한다. 추사가 글씨의 모범으로 삼은 것은 중국 전한시대의 예서였다. 이 시기 예서는 획을 시작하거나 끝맺을 때 아무 변화를 주지 않는다. 서예에서는 이를 ‘파세’가 없는 글씨라 부른다. 파세가 없다는 것은 한나라 이전에 쓰이던 전서의 맛을 되살린다는 의미도 지닌다. 추사는 “전한시대 예서에 뜻을 두면 방경고졸(반듯하고 굳세며 예스럽고 꾸밈없음)한 글씨를 얻을 수 있다”고 늘 말했다.

그래서 김 위원은 추사 글씨라는 작품에 파세가 심하거나 기교가 넘쳐나면 조금 의심해 봐야 한다고 했다. 서울 봉은사의 ‘판전’ 편액을 ‘동자체(어린아이 글씨체)’라 부르는 것도 파세가 전혀 없고 기교를 부린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천근만근의 힘이 실려 있다. 전한시대 예서에서 얻은 고졸함과 굳셈이 극치에 이른 글씨로, 남이 함부로 따를 수 없는 추사 글씨의 멋이 여기에 있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인 1856년 10월 7일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세로 77 cm, 가로 181 cm 크기로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제주 유배 시절인 1844년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세한도’는 국보로, 소장가 손창근 씨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과천 시절 글씨와 제자 허련, 그리고 추사 연구

추사의 큰 글씨는 대부분 말년 작품이다. 특히 제주 유배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쓴 것이 거의 전부다. 나이가 들수록 명성이 더 빛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시간적 여유가 생긴 데다 귀양살이의 적적함과 만년의 쓸쓸함이 많은 작품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과천 시절 작품에는 유독 관지(작품에 쓴 날짜·장소·이름 등의 기록)가 많다. 반면 그 밖의 작품에는 쓴 해의 기록이 없어 정확한 제작 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추사의 글씨를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은 제자 소치 허련이다. 허련이 판에 새겨 만든 여러 탁본 서첩은 사람들이 추사를 이해하고 추사체를 익히는 중요한 교본이었다. 추사 이후 추사체를 공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 바로 소치의 탁본첩이었다. 김 위원은 “서울의 양반 자제들이 문집을 만들어 추사의 정신을 보려 했다면, 진도 출신 제자는 서첩을 만들어 추사 글씨의 진면목을 보였다”며 “추사는 인생의 파란곡절은 많았지만 제자 복은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추사의 글은 세상을 떠난 뒤 책으로 묶였다. 1868년 문인 남병길이 ‘완당척독’ 2책과 ‘담연재시고’ 2책을 엮었고, 같은 해 남병길·민규호가 ‘완당집’ 5권 5책을 펴냈다. 1934년에는 동생 상희의 고손 김익환이 ‘완당선생전집’ 10권 5책을 간행했다.

추사 연구에서 과천은 특별한 이름이다.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는 1936년 도쿄제국대학 박사논문 ‘이조에 있어서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을 냈고, 이 연구는 1975년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로 출간됐다. 1976년 최완수의 ‘김추사연구초’, 2002년 유홍준의 ‘완당평전'(3책)이 뒤를 이었다. 과천시는 2009년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 번역본을 ‘추사 김정희 연구’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김 위원은 추사 글씨 감상법을 일러 줬다. 누구의 평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느껴서 보라는 것이다. 마음속에 선입견이 있으면 작품의 느낌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부 글씨로 머릿속에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추려 하면 글씨 공부는 늘지 않는다. 다양하고 구성미가 뛰어난 추사체는 더욱 그렇다. 김 위원은 “한 자 한 자 떼어서 보면 추사의 진면목을 잃기 쉽다”며 “한 자와 전체, 전체와 한 자를 함께 보는 것이 추사 글씨를 보는 첫 단계”라고 강조했다.


“추사 글씨는 한 자가 아니라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인터뷰] 김영복 KBS 1TV ‘TV쇼 진품명품’ 고서·서예 감정위원

 

김영복 고서·서예 감정위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제대로 보려면 선입견을 버리고 전체 구성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경학과 시문, 글씨를 함께 보아야 추사의 전면을 보는 것이며, 글씨만 보면 추사의 일부를 보는 데 그친다”고 강조했다.

김영복 감정위원

김영복 위원은 지난 9월 11일 과천문화원 과천시 승격 40주년 기념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 두 번째 강좌 ‘추사 김정희와 과천’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날 김영복 위원은 추사의 가문과 연보, 경학과 서학을 정리하며 추사 예술의 요체에 대한 견해를 내놓았다.

공개된 이력에 따르면, 김영복 위원은 1954년 강원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 인사동 통문관에서 일했고 문우서림 대표를 지냈다. 2005년부터 KBS 1TV ‘TV쇼 진품명품’ 고서·서예 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옥션 단 대표를 거쳐 케이옥션 고문을 맡고 있다. 한국추사회 부회장과 추사연구회 운영위원으로도 일한다.

다음은 김영복 위원의 강의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Q. 추사의 글씨를 흔히 세 단계로 나누는데.

A. 습작기인 24세까지, 연경에 석 달 다녀와 55세에 제주도로 유배 갈 때까지, 그리고 제주 유배와 방환, 북청 유배를 거쳐 과천에서 7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를 세 단계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보통 세 번째 시기의 글씨를 추사체라 부른다. 그러나 말년의 글씨는 처음 글씨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고졸하다. 중국에 다녀온 뒤 달라지기 시작한 글씨부터 10년쯤을 연습기로 보고, 그 이후를 추사체라 부르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Q. 25세의 연경행이 그만큼 중요한가.

A. 아버지의 자제군관으로 석 달 다녀온 것이 다른 사람의 10년 유학보다 그의 생애에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전에는 가학으로 배웠지만, 담계 옹방강과 운대 완원, 그리고 그 제자들을 만나면서 학문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졌다. 글씨에도 다른 공부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이후 제주도 유배를 겪으며 중국과 우리나라 글씨의 장점을 모두 살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획을 더해, 누구도 함부로 구사하기 어려운 글씨를 만들어 냈다.

Q. 추사 글씨의 장점은 어디에 있나.

A. 대자다. 이런 대자 글씨는 그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아직 없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별로 없을 것이다. 큰 자를 축소해 보면 원 글씨의 맛이 많이 떨어지는데, 이는 한 작품을 쓸 때마다 전체 크기에 맞는 구도를 가지고 썼다는 증거다. 지금의 공간 개념을 그 당시에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Q. 서체 사이의 관계도 남다르다고 했다.

A. 예서 한 자를 쓰더라도 그 속에 전서·행서·해서의 기운을 충분히 보태 무한한 변화를 추구했다. 청나라의 김농이나 정판교도 그런 풍을 좇았지만, 오체의 융합과 글자의 강약·대소가 자유자재로 스며 녹아 있는 글씨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추사 글씨는 전체 짜임새, 곧 공간 구성을 보아야 한다. 공간 경영의 조화가 어우러지지 않으면 추사 글씨가 아니다.

Q. 봉은사 ‘판전’을 동자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A. 추사는 글씨의 모범을 전한시대 예서에서 찾았다. 시작하거나 끝맺을 때 변화를 주지 않는, 파세가 없는 글씨를 이상으로 삼았다. 판전은 파세가 없는 데다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은 느낌이 들어 동자체라 불리지만, 그 안에는 천근만근의 힘이 들어 있다. 반대로 추사 글씨라는 작품에 파세가 심하거나 기교가 넘쳐나면 조금 의심해 보아야 한다.

Q. 추사의 큰 글씨는 주로 언제 쓴 것인가.

A. 대부분 말년 작품이다. 특히 제주 유배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작품이 거의 전부다. 벼슬을 그만둬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귀양살이의 적적함과 만년의 쓸쓸함이 많은 작품을 하게 한 것 같다. 과천 시절 작품에는 유독 관지를 많이 남겼는데, 그 밖의 작품은 쓴 해의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Q. 제자 허련의 역할도 컸다고 했다.

A. 소치 허련이 판각한 탁본 서첩은 사람들이 추사를 이해하고 추사체를 익히는 매우 중요한 학습용 글씨첩이었다. 추사 이후 추사체를 공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 바로 소치의 탁본첩이다. 서울의 양반 자제들이 문집을 만들어 추사의 정신을 보려 했다면, 진도 출신 제자는 서첩을 만들어 추사 글씨의 진면목을 보였다. 추사는 인생의 파란곡절은 많았지만 제자 복은 있는 사람이었다.

Q. 추사 글씨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A. 누구의 평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느껴서 보아야 한다. 마음속에 선입견이 있으면 그 느낌을 제대로 가지기 어렵다. 일부분의 글씨로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추려 하면 글씨 공부는 늘지 않는다. 한 자와 전체, 전체와 한 자를 함께 보는 것이 추사 글씨를 보는 첫 단계다.



[현장탐방] 추사의 마지막 4년이 머무는 곳, 과천 추사박물관

2023년 6월 개관, 과지초당(瓜地草堂)·독우물 등 국내 대표 추사 기념관

과천시는 1966년 과천관련 추사 김정희 연구보고서를 발간한 이래 추사를 조명하는 여러 사업을 추진해왔습니다. 2006년에는 유명한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츠가 치카시(藤塚隣 1879~1948)박사가 수집한 방대한 양의 추사관련 자료를 그의 아들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 선생이 과천시에 기증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2007년에는 과지초당과 독우물을 복원하였습니다. 과천시는 2011년 5월 착공, 2013년 6월 3일 추사박물관을 문 열었다. 사진=경기문화재단
과지초당. 추사박물관에 따르면, 추사 선생이 과천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생부 유당 김노경(1766 ~ 1837) 이 주암동에 과지초당을 조성하면서 부터다. 과지초당은 1824년 청계산 옥녀봉 아래 돌무께(현 주암동)에 마련한 일종의 별장이다. 과지초당은 정원과 숲이 빼어나고, 연못의 아름다움을 갖춰 추사 가문의 절정의 역량을 상징하는 곳이다. 과지초당은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다하여 청관산옥(靑冠山屋)으로도 불렸다. 사진=추사박물관

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1번 출구에서 시영버스로 갈아타면 몇 정거장 만에 ‘추사박물관’ 앞에 닿는다.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 78, 청계산 자락이 내려앉은 주암동이다. 조선 후기 학예의 거장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생의 마지막 4년을 보낸 바로 그 자리에 세운 박물관이다.

과천시가 이곳에 박물관을 세우기까지는 오랜 준비가 있었다. 과천시는 추사의 과천 시절을 지역의 문화 자산으로 보고 재조명 사업을 이어 왔다. 1996년 과천 관련 추사 연구 보고서를 낸 것을 시작으로 2004년부터 해마다 추사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2006년에는 일본인 추사 연구자 후지츠카 아키나오(1912~2006)에게서 추사 자료를 기증받았다. 그 결실로 2013년 6월 3일 추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부지 4299 ㎡에 자리한 박물관의 소장 유물은 1만6315점에 이른다.

과지초당과 독우물, 추사가 머문 자리

건물보다 마당에 먼저 눈길이 간다. 야외에는 ‘과지초당’이 복원돼 있다. 나란히 선 두 채의 소박한 가옥과 연못, 추사가 항아리를 묻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독우물이 그대로다. 과천시 추사박물관에 따르면, 과지초당은 추사의 생부 김노경(1766~1837)이 마련한 별장이다. 1824년 서른아홉 살의 추사가 조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1837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추사는 청계산 중턱에 묘를 쓰고 이곳에서 시묘살이(부모 무덤 곁에서 상을 치름)를 했다.

추사가 과지초당으로 완전히 돌아온 것은 1852년 10월 9일,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직후였다. 그리고 1856년 10월 10일 71세로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흔히 ‘과천 시절’이라 부르는 이 4년은 추사 학문과 예술의 절정기로 꼽힌다. 이 시기 추사는 서울 봉은사를 자주 오가며 학문과 글씨에 몰두했고, 대표작 상당수가 이때 나왔다.

전시는 2층에서 시작한다. ‘추사의 생애’ 전시실은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스물넷에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고,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 뒤 제주와 북청으로 두 차례 유배를 떠난 71년의 세월을 차례로 짚는다. 180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는 생부를 자제군관으로 따라가 이듬해 북경에서 옹방강(1733~1818)·완원(1764~1849) 두 스승을 만난 일, 1816년 북한산 순수비를 고증한 일, 1819년 문과 급제 뒤 1826년 충청우도 암행어사와 1836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일이 이어진다. 1840년 부친을 겨냥한 탄핵의 여파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돼 1848년 풀려났고, 1851년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 시련의 기록도 함께 놓였다. 영광과 시련이 번갈아 놓인 연보 앞에서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1층 ‘추사의 학예’ 전시실은 금석학과 글씨, 그림으로 이어진다. 북한산 순수비를 고증한 금석학자의 면모와 예서·전서·해서·행서·초서 다섯 서체가 한데 녹아든 추사체가 나란히 놓였다. 전시실을 나서면 박물관 벽면에 새겨진 ‘불이선란도’가 관람객을 맞는다.

일본인 학자가 모은 추사, 과천으로 돌아오다

지하 1층 ‘후지츠카 기증실’은 이 박물관에서 가장 뜻밖의 공간이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한학자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는 평생 추사 자료를 모았고,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가 2006년 그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했다. 1만6315점에 이르는 소장 유물의 바탕이 여기에 있다. 서예가 손재형이 두 달 동안 문안을 거듭한 끝에 1944년 ‘세한도’를 돌려받은 상대도 바로 후지츠카 치카시였다.

같은 층 상설체험실에서는 추사 글씨 따라 쓰기와 난 치기,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탁본을 직접 해 볼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특별기획전이 열린다. 두 개 층과 야외를 천천히 둘러보는 데는 두 시간 안팎이 걸린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이며, 입장은 오후 5시까지다. 매주 월요일(공휴일이면 다음 날)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에는 문을 닫는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오후 6~9시까지 연장 운영한다. 관람료는 어른 2000 원, 중고생·군인 1000 원, 초등학생 500 원이며, 20명 이상 단체는 어른 1000 원, 중고생·군인 500 원, 초등학생 300 원이다. 6세 이하 어린이와 65세 이상 어르신은 무료다. 주차는 34대까지 할 수 있고 요금은 받지 않는다.

추사가 남긴 마지막 글씨는 정작 이곳에 없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인 1856년 10월 7일에 쓴 ‘판전’ 편액은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 걸려 있다. 편액 끝에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는데, 일흔한 살의 ‘과(果)’가 병중에 썼다는 뜻이다. ‘과’는 추사가 노년에 쓴 별호 ‘과로(果老)’를 줄인 말이다. 제주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그러나 그 글씨들이 나온 자리는 과천이다. 과지초당 툇마루에 앉아 독우물 쪽을 내려다보면, 일흔한 살 노인이 병중에 붓을 들던 시간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문의 : 과천시 추사박물관(02-2150-3650)

이 기사는 보건복지부·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주최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시니어신문네트워크가 주관하는 ‘2026 노인자원봉사 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김수동 기자
김수동 기자
36년간 중등교직에 근무하였다. 풍생고 교사, 교감, 풍생중학교 교장, 안산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고 퇴직하였다. 국민교육 유공으로 교육부 장관 표창(1994. 12.5), 국민교육발전 유공으로 녹조근정훈장(2017. 8. 31)을 수상했다. 신구대, 동서울대 강사를 지냈으며 과천시노인복지관에서 스마트매니저로 근무했다. 2023년 7월부터 과천시니어신문 취재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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