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과천이 시로 승격된 지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과천문화원’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9회에 걸쳐 시민과 함께하는 역사인문학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를 문원생활문화센터 관악홀에서 진행합니다. 강좌는 선사·고대부터 고려·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분야별 전문가가 과천의 역사·인물·문화유산을 짚습니다. 과천시니어신문은 보건복지부’노인자원봉사활성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매 강좌의 내용을 토대로 9회에 걸쳐 과천역사를 연재합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오늘을 함께 만들며 미래를 설계하는 과천 천년 역사 여행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공동취재]
현장강의 취재=김마리아·심일보·김인숙 기자
인터뷰 취재=송영운·이원호·전승민 기자
기자수첩=박창용·김수동·양명업 기자
[취재협조]
과천문화원 이정달 원장
[싣는 순서]
1회 고대사,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본 선사~고대의 과천 (김무중 교수, 9월 4일)
2회 추사 김정희와 과천 (김영복 감정위원, 9월 11일)
3회 고려시대, 과주(果州)의 탄생 (정요근 교수, 10월 2일)
4회 조선시대, 과천현 및 관료제도 (김문웅 교수, 10월 16일)
5회 최세진과 한글보급 (송철의 교수, 10월 23일)
6회 근현대사, 과천은 어떻게 과천시가 되었나? (최종고 교수, 10월 30일)
7회 정조와 과천 (이충구 교수, 11월 6일)
8회 삼국시대, 한강을 둘러싼 전쟁과 과천 (여호규 교수, 11월 13일)
9회 과천의 길, 사람, 문화유산 이야기 (이정찬 회장, 11월 20일)
조선시대 과천현은 경기 남부의 작은 고을이었지만, 그 수령인 과천현감은 고을 살림과 함께 군사 임무까지 맡았다. 임금이 관리에게 내린 임명장 ‘교지(敎旨)’에는 이런 과천현감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과천문화원’은 지난 16일 오후 2~4시 문원생활문화센터 관악홀(과천문화원 지하 1층)에서 시 승격 40주년 기념 역사인문학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의 네 번째 강좌를 열었다. 강사로 나선 김문웅 교수는 ‘조선시대, 과천현 및 관료제도’를 주제로, ‘교지로 읽는 조선의 관료제와 과천’이라는 부제를 걸고 강연했다. 김 교수는 57년 동안 교지를 모으고 연구해 온 교지 연구가다.
강의는 교지의 이해, 교지의 기원, 조선시대 품계, 과거 및 인사제도, 결어의 다섯 갈래로 짜였다. 김 교수는 실제 교지 사진을 화면에 띄워 가며, 수백 년 전 문서 한 장 한 장에 담긴 조선의 관료제를 풀어냈다.
행정은 막내, 군사 직함은 여럿
김 교수에 따르면, 조선의 지방 행정은 관찰사를 정점으로 부윤·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으로 이어졌다. 과천현의 수령인 현감은 이 가운데 맨 끝자리다. 현감은 종6품 벼슬로, 고을 수령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군사 계통은 따로 짜여 있었다. 조선의 지방 군사 조직은 병마절도사가 지휘하는 주진(主鎭) 아래, 절제사·첨절제사가 맡는 거진(巨鎭), 동첨절제사·절제도위가 맡는 제진(諸鎭)으로 이뤄졌다. 고을 수령은 이 군사 직함을 함께 맡았다.
강의에서 소개된 교지가 이를 보여 준다. 1834년(순조 34년) 과천현감 류상림(柳相林)은 ‘여주진관 과천 병마절제도위’로 임명하는 교지를 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총리영 별우사 파총’으로 임명한다는 전령도 받았다. 총리영은 1802년 수원 화성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군영이다. 과천현감은 고을을 다스리는 동시에 여주진관에 속한 군사 직함을 맡았고, 화성을 지키는 총리영의 직함도 받았다.
품계는 높게, 벼슬은 낮게… 교지로 읽는 인사 원칙
김 교수가 화면에 띄운 교지 가운데는 과천현감 임명 교지도 있었다. 현종 때 방명규(房明圭)에게 내린 교지에는 ‘통훈대부 행 과천현감(通訓大夫行果川縣監)’이라고 적혀 있다. 통훈대부는 정3품 하계의 품계이고, 과천현감은 종6품 벼슬이다. 품계가 벼슬보다 높을 때 둘 사이에 ‘행(行)’ 자를 넣는다.
반대 경우도 있다. 1701년(숙종 27년) 남정중(南正重)이 받은 교지에는 ‘통정대부 수 광주부윤(通政大夫守廣州府尹)’이라고 쓰여 있다.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가 종2품 벼슬인 광주부윤을 맡으면서, 품계가 벼슬보다 낮을 때 붙이는 ‘수(守)’ 자가 들어갔다.
김 교수는 조선이 ‘계고직비(階高職卑, 품계는 높고 벼슬은 낮음)’의 행법으로 인사를 융통성 있게 운영했고, ‘계비직고(階卑職高, 품계는 낮고 벼슬은 높음)’의 수법으로는 3품계 안에서 인사가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사람의 등급과 자리를 따로 관리해 인재를 유연하게 쓴 제도다.
과천현감 민치록과 풍수 이야기
김 교수는 우리 삶에 녹아 있는 문화도 함께 짚었다. 태호복희의 『역경』은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음양으로 보고 서로 상반되면서도 보완하며 살아가는 ‘2수(數) 문화’를 낳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우주의 근본인 도(道) 안에서 덕(德)을 억지 없이 순리대로 행하는 하늘·땅·사람의 ‘3수 문화’를 만들었다. 도선의 풍수지리는 지구가 자전·공전하며 사계절이 뚜렷해지는 이치를 잘 이용해 살아가는 문화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과천현감을 지낸 민치록(1799~1858)의 묘 이야기도 소개됐다. 민치록은 명성황후의 아버지다. 강의 자료에 따르면, 그의 묘는 다섯 번 옮겨지고 여섯 번 장례를 치렀다(5천6장). 처음 여주에 묻힌 뒤 제천·이천·광주·보령으로 차례로 옮겨졌고, 보령 이장 항목에는 ‘1년 후 시해’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2003년 후손들이 처음 묻혔던 여주로 다시 모셨다.
연주대와 ‘과천의 원형리정’
과천의 명승지 관악산 연주대도 강의에 등장했다. 연주대는 조선시대부터 이름난 명승지로, 왕위를 동생 세종에게 양보한 양녕대군이 남긴 오언절구가 전해진다. “산 노을로 아침밥을 짓고(山霞朝作飯), 여라에 걸린 달로 등불을 밝히네(蘿月夜爲燈). 홀로 외로이 암자에서 자고 나니(獨宿孤庵下), 오로지 탑 한 층만 남아 있네(唯存塔一層).” 김 교수는 마지막 구절은 해석이 분분하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2024년 3월 5일 경칩에 직접 지은 시 ‘과천의 원형리정(元亨利貞)’도 소개했다. 원형리정은 『역경』에서 하늘의 네 가지 덕을 일컫는 말로, 시는 과천의 사계절을 노래한다.
“과천에 봄이 오면 뜰 안에 복수초 꽃봉오리 내밀며 봄소식을 전하고, 관악산 연분홍 진달래 철쭉꽃이 등산객들을 부르네. 갈현동 지식정보타운은 4차 산업혁명에 부합되어 과천이 전국을 향도하는 활기찬 도시로 성장해 가네.”
“과천에 여름이 오면 장미원 아름다운 장미꽃은 양귀비도 수줍게 하고, 관문천 건폭이 장맛비에 웅장한 폭포수를 쏟아내네. 관문동 신도비는 정묘호란 때 장렬히 순국하신 충의공 애국충절의 교훈인데 과천의 자부심이라네.”
“과천에 가을이 오면 시청 앞 사거리 노란 은행잎은 황홀경에 들게 하고, 대공원 단풍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현대미술관이네. 청계산 매봉은 울긋불긋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과천의 상징 연주대 오르니 양녕대군 시가 떠오르네.”
“과천에 겨울이 오면 갓뫼가 병풍같이 북풍을 막아 주어 기후는 온화하고, 뭇사람 모여들어 저마다 살기 좋은 고장이라 칭하네. 온온사 직접 체험하신 정조대왕 친필 현판 아래서 동호인 역사 토론장이 될 만도 하니 과천에 자랑일세.”
수백 년 전 교지 속 과천현감의 이름과 오늘의 과천을 노래한 시는 모두 같은 땅의 이야기다. 김 교수는 교지 한 장 한 장을 통해 과천이 조선의 행정과 군사 체계 속에서 맡았던 역할을 오늘의 시민들에게 되살려 보였다.
[인터뷰] “교지 한 장에 조선 관료제와 과천 역사가 담겨 있다”
김문웅 교수
김문웅 교수는 교지 한 장 한 장에 조선의 관료제가 담겨 있으며, 과천현감 교지를 통해 과천이 조선의 행정과 군사 체계에서 맡았던 역할을 읽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조선은 행수법으로 품계와 벼슬을 나눠 인사를 융통성 있게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김문웅 교수는 10월 16일 과천문화원 과천시 승격 40주년 기념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 네 번째 강좌에서 ‘조선시대, 과천현 및 관료제도’를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역사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국가안보회의와 비상기획위원회 실·국장을 지냈다. 57년 동안 국왕의 통치 문서인 교지를 모으고 연구해 왔다.
김문웅 교수의 강의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Q. 교지란 무엇인가.
A. 임금이 관리를 임명하거나 품계를 올려 줄 때, 과거 합격자에게, 부인이나 세상을 떠난 이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릴 때 주던 문서다. 시대에 따라 선지·왕지·교지·칙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1427년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문서는 ‘왕지’라고 쓰여 있다. 교지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 품계, 벼슬, 날짜가 적혀 있다.
Q. 조선시대 과천현은 어떤 고을이었나.
A. 행정 계통으로 보면 관찰사 아래 부윤·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 가운데 현감이 다스리는 고을이었다. 군사 계통에서는 과천현감이 제진의 절제도위를 함께 맡았다. 1834년 과천현감 류상림은 여주진관 과천 병마절제도위 교지와 총리영 별우사 파총 전령을 함께 받았다.
Q. 교지에 쓰인 ‘행’과 ‘수’는 무슨 뜻인가.
A. 품계가 벼슬보다 높으면 ‘행’, 낮으면 ‘수’를 쓴다. 과천현감 방명규의 교지에는 ‘통훈대부 행 과천현감’, 광주부윤 남정중의 교지에는 ‘통정대부 수 광주부윤’이라고 적혀 있다. 계고직비의 행법으로 인사를 융통성 있게 운영했고, 계비직고의 수법으로는 3품계 안에서 인사가 가능했다.
Q. 조선의 품계는 어떻게 짜여 있었나.
A. 9개 품을 정·종으로 나눠 18개 품이 되고, 종6품부터 상·하로 나눠 30품계가 된다. 종9품부터 정7품까지는 참하관, 종6품부터 정5품까지는 조회에 참석하는 참상관으로 이 둘이 낭관이다. 종4품부터 정3품 하계까지가 당하관, 정3품 상계부터 정1품 상계까지가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당상관으로 이 둘이 대부다.
Q. 과거는 누구나 볼 수 있었나.
A. 양인이면 응시할 수 있었지만 경제적 형편과 교육 환경, 보단자 문제로 사실상 어려웠다. 생원·진사시는 최종 각 100명, 문과는 33명을 뽑았다. 문과 급제자는 홍패 교지와 함께 어사화와 어주를 받고 사흘 동안 유가를 했다. 무과는 급제자가 남발돼 극소수만 관리로 임명됐고, 많은 이가 ‘출신’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마쳤다.
Q. 조선의 인사는 어떻게 이뤄졌나.
A.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가 맡았다. 낭관은 3배수를 추천해 임금이 낙점한 뒤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을 거쳐 발령했다. 승진에는 참하관 450일, 참상관 이상 900일이 걸렸고, 당상관은 임금의 특지인 가자가 있어야 오를 수 있었다. 관찰사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1명씩 당연히 겸했다.
Q. 과천과 관련해 소개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A. 과천현감을 지낸 민치록은 명성황후의 아버지로, 그 묘가 여주에서 제천·이천·광주·보령으로 다섯 번 옮겨지고 여섯 번 장례를 치렀다. 2003년 후손들이 처음 자리였던 여주로 다시 모셨다. 관악산 연주대는 조선의 명승지로, 양녕대군의 오언절구가 전한다. 과천의 사계절을 노래한 시 ‘과천의 원형리정’도 지었다.
[기자수첩] 교지 한 장으로 읽는 조선의 벼슬길… 30품계에서 과거까지

조선의 관리는 임금이 직접 내린 문서 한 장으로 벼슬을 얻었다. 그 문서가 ‘교지(敎旨)’다. 교지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과 품계, 맡을 벼슬, 날짜가 적혀 있어, 한 장만 들여다봐도 조선 관료제의 구조가 한눈에 드러난다.
김문웅 교수의 ‘과천 역사 바로알기’ 강의 자료를 바탕으로, 교지 속에 담긴 조선의 벼슬 이야기를 정리했다.
왕지에서 교지로, 임금의 명령서
교지는 임금이 관리를 임명하거나 상을 내릴 때 주던 문서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문서는 시대에 따라 선지·왕지·교지·칙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초에는 ‘왕지(王旨)’라고 썼다. 1427년(세종 9년)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문서 첫머리에도 ‘왕지’라는 두 글자가 뚜렷하다.
이 왕지에는 맹사성의 품계와 벼슬이 길게 이어진다. 품계는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이고, 맡은 벼슬은 의정부 우의정이다. 여기에 영집현전경연사·감춘추관사를 겸하고, 판병조사와 세자부까지 맡았다. 한 사람이 집현전과 경연, 역사 편찬, 국방, 세자 교육을 아울렀던 것이다. 문서 끝에는 명나라 연호를 쓴 ‘선덕 2년 2월 16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교지는 임명장에만 쓰이지 않았다. 과거 합격증인 백패(생원·진사)와 홍패(문과·무과), 세상을 떠난 이에게 벼슬을 높여 주는 증직 교지, 관리의 부인에게 내리는 부인 교지, 죽은 뒤 시호를 내리는 시호 교지도 있었다. 1748년(영조 24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남익엽이 받은 유서(諭書)에는 병력 동원에 쓰는 임금의 밀부(밀명을 확인하는 표식) 가운데 제21부가 함께 내려졌다. 1637년(인조 15년) 병자호란 직후 여이징은 경기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개성부 강화부유수로 임명하는 교서를 받았다.
18단계를 30단계로, 조선의 품계
조선의 관리 등급은 1품부터 9품까지 정(正)·종(從)으로 나눈 18개 품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종6품 이상은 다시 상·하로 나눠, 모두 30개의 품계가 만들어졌다.
이 30품계는 크게 네 무리로 나뉜다. 강의 자료에 따르면, 종9품부터 정7품까지 6개 품계는 ‘참하관’, 종6품부터 정5품까지 8개 품계는 아침 조회에 참석하는 ‘참상관’이다. 둘을 묶어 ‘낭관’이라 했다. 종4품부터 정3품 하계까지 7개 품계는 ‘당하관’, 정3품 상계부터 정1품 상계까지 9개 품계는 임금 앞 회의에 참석하는 ‘당상관’이며, 이 둘을 ‘대부’라 했다.
품계와 벼슬은 서로 다른 개념이었다. 품계는 사람의 등급이고, 벼슬은 맡은 자리다. 과천현감은 종6품 벼슬이지만, 이 자리에 정3품 하계인 통훈대부가 임명되기도 했다. 이처럼 품계가 벼슬보다 높을 때는 ‘행(行)’, 반대로 품계가 벼슬보다 낮을 때는 ‘수(守)’를 붙였다. 이를 ‘행수법’이라 한다. 현종 때 과천현감 방명규의 교지에는 ‘통훈대부 행 과천현감’, 1701년 광주부윤 남정중의 교지에는 ‘통정대부 수 광주부윤’이라고 적혀 있다.
양인이면 누구나… 그러나 쉽지 않았던 과거
조선 관리가 되는 정식 통로는 과거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는 고려 4대 광종 9년(958)에 치러졌다. 조선에서는 양인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지만, 김 교수는 경제적 형편과 교육 환경, 신원을 보증하는 보단자 문제 때문에 사실상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과거는 생원·진사시,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다. 정기 시험인 식년시는 3년에 한 번,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간 해에 열렸다. 이 밖에 임금이 즉위할 때의 증광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의 별시, 학문을 권장하기 위한 알성시, 왕실의 큰 경사 때의 정시, 무과 시험인 도시, 왕실 경사 때의 춘당대시, 지역민을 위한 외방별시 같은 비정기 시험도 있었다.
생원·진사시는 예조가 맡았다. 식년시 전해에 한성부와 관찰사가 주관하는 초시에서 생원과 진사를 각 700명씩 뽑았다. 생원은 경서를, 진사는 부(賦)와 고시(古詩)를 시험했다. 초시 정원은 한성 260명, 충청·전라 각 90명, 경상 100명, 강원·평안 각 45명, 황해·함경 각 35명으로 나눴다. 이어 초시 700명과 사학(4학) 30명, 합제 48명 등 모두 778명이 복시를 치렀고, 최종적으로 생원·진사 각 100명이 입격했다. 등급은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이었다. 합격자는 백패 교지를 받고 문과 응시 자격과 군역 면제 혜택을 얻었다.
장원급제와 어사화, 문과와 무과
문과도 식년시는 초시·복시·전시의 세 단계로 치렀다. 초시는 243명을 뽑았고, 생원·진사가 성균관에서 300일을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지역별로 한성 60명, 충청·전라 각 25명, 경상 30명, 강원·평안 각 15명, 황해 10명, 함경 13명, 성균관 50명이 정원이었다. 초장에서는 사서와 논, 중장에서는 부와 표전, 종장에서는 대책을 시험했다. 복시에서는 33명을 뽑았고, 전시에서는 임금이 직접 나와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등급만 나눴다.
합격자에게는 붉은 종이의 홍패 교지가 내려졌다. 임금 앞에서 어사화와 어주를 받고, 사흘 동안 거리를 행진하는 유가(遊街)를 했으며, 종6품에서 정9품 사이의 벼슬을 받았다. 1834년(순조 34년) 문과 갑과 1등, 곧 장원으로 급제한 심의승의 홍패에는 ‘문과 갑과 제일인 급제 출신자’라고 적혀 있다.
무과는 고려 중기 예종 4년부터 인종 11년까지 25년 동안 실시된 뒤 폐지됐다. 문관도 무관직을 맡으면 군사를 운영해야 했기에 문무겸비가 강조됐다. 조선의 무과 초시는 서울 훈련원과 지방 병마절도사가 맡아 190명을 뽑았고, 강서와 활쏘기, 창술을 시험했다. 지역별로 훈련원 70명, 충청·전라 각 25명, 경상 30명, 그 밖의 도는 각 10명이었다. 복시는 병조와 훈련원이 함께 28명을 뽑았으며, 말 위와 땅 위에서 공을 치는 격구도 시험했다. 전시에서는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등급을 매겼다. 합격자는 군역을 면제받고 문과에 준해 관리로 임명됐다. 다만 무과 급제자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면서 극소수만 실제 관리로 임명되고, 나머지는 ‘출신’이라는 이름만 지닌 채 생을 마쳤다. 1556년(명종 11년) 김증은 무과 병과 68등으로 급제했다.
추천과 낙점, 그리고 청백리
조선의 인사는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가 맡았다. 이조의 정랑이 인사안을 기안하고 후임을 추천하는 권한을 가졌다. 낭관은 3배수를 추천해 임금이 낙점한 뒤,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경(인사 검증)을 거쳐 발령했다. 당하관은 3배수 추천과 임금의 낙점만으로 발령했다.
승진에는 참하관 450일, 참상관 이상은 900일이 필요했다. 당상관으로 오르려면 임금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는 ‘가자(加資)’가 있어야 했다. 다만 승문원 판교, 봉사시 정, 통례원 좌통례(통훈대부), 훈련원 정(어모장군)은 당연히 승진하는 자리였다. 무관은 정3품 상계 절충장군에서 그치고, 더 오르면 종2품 가선대부가 됐다. 관찰사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1명씩 당연히 겸했고, 병마절도사는 종2품 가선대부, 수군절도사는 정3품 상계 절충장군이 맡았다.
교지 가운데는 깨끗한 관리를 기린 것도 있다. 1747년(영조 23년) 정형복은 청백리로서 종2품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 받았다. 김 교수는 고려 때 순천부사 최석의 청렴을 기린 기념비도 함께 소개했다.
이 밖에 1791년(정조 15년) 서매수의 도승지 교지, 1761년(영조 37년)의 대사간 교지, 1783년(정조 7년) 조중회의 시호 교지도 함께 소개됐다. 교지 한 장에는 한 사람의 인생과 함께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람을 뽑고 쓰던 원칙이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