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과천이 시로 승격된 지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과천문화원’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9회에 걸쳐 시민과 함께하는 역사인문학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를 문원생활문화센터 관악홀에서 진행합니다. 강좌는 선사·고대부터 고려·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분야별 전문가가 과천의 역사·인물·문화유산을 짚습니다. 과천시니어신문은 보건복지부’노인자원봉사활성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매 강좌의 내용을 토대로 9회에 걸쳐 과천역사를 연재합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오늘을 함께 만들며 미래를 설계하는 과천 천년 역사 여행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공동취재]
현장강의 취재=김수동·김마리아·김인숙 기자
인터뷰 취재=송영운·이원호·전승민 기자
기자수첩·사진촬영=박창용·심일보·양명업 기자
[취재협조]
과천문화원 이정달 원장
[싣는 순서]
1회 고대사,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본 선사~고대의 과천 (김무중 교수, 9월 4일)
2회 추사 김정희와 과천 (김영복 감정위원, 9월 11일)
3회 고려시대, 과주(果州)의 탄생 (정요근 교수, 10월 2일)
4회 조선시대, 과천현 및 관료제도 (김문웅 교수, 10월 16일)
5회 최세진과 한글보급 (송철의 교수, 10월 23일)
6회 근현대사, 과천은 어떻게 과천시가 되었나? (최종고 교수, 10월 30일)
7회 정조와 과천 (이충구 교수, 11월 6일)
8회 삼국시대, 한강을 둘러싼 전쟁과 과천 (여호규 교수, 11월 13일)
9회 과천의 길, 사람, 문화유산 이야기 (이정찬 회장, 11월 20일)
고려시대의 과천은 ‘과주(果州)’라는 이름의 고을이었다. 그 영역은 지금의 과천시를 넘어 서울 서초구·동작구 일부와 안양시, 군포시 일부까지 아우를 만큼 넓었다. 오늘 우리가 쓰는 ‘과천’이라는 이름도 이 과주에서 이어졌다.
‘과천문화원’은 지난 10월 2일 오후 2~4시 문원생활문화센터 관악홀(과천문화원 지하 1층)에서 시 승격 40주년 기념 역사인문학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의 세 번째 강좌를 열었다. 강사로 나선 정요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고려시대 과주(果州)의 탄생’을 주제로 강연했다. 정 교수는 『고려사』·『삼국사기』 같은 문헌 기록과 연구 논문, 문화유산을 함께 활용해 고려시대 과주의 모습을 되살렸다.
정 교수에 따르면, 과주는 과천이라는 지명의 뿌리다. 『고려사』 지리지는 과주가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동사힐이라고도 함)이었고, 신라 경덕왕 때 율진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고 기록한다. 현종 9년(1018)에는 광주목에 딸렸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 별호는 부안(성종 때 정함) 또는 부림이었고, 고을 안에는 관악산이 있었다.
이름만 ‘주’, 실제는 작은 고을
고려 초에는 ‘주(州)’나 ‘부(府)’라는 이름을 가진 고을이 한꺼번에 많이 생겼다. 원래 주와 부는 수도 다음가는 높은 지위의 고을을 뜻했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을 전후한 고려 초에는 실제 지위보다 이름만 높은 ‘주·부’가 쏟아졌다. 왕건에게 스스로 귀순하거나 공을 세운 지역에 상을 주거나 배려하는 의미였고, 이런 이름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주변 사례를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수성군은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김칠·최승규 등 200여 명이 귀순해 공을 세워 수주(水州, 현 수원)가 됐다. 곡양현이 금주(衿州, 현 서울 금천)가 된 배경에는 삼한벽상공신 궁진과 안양사의 고승 능정이 있다. 개산군은 삼한공신 박기오와 태조의 초상을 모신 봉업사 덕분에 죽주(竹州, 현 안성 죽산)가 됐다. 황무현은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서목이 강을 건너도록 길을 안내한 공으로 ‘큰 내를 건너 이롭다(이섭대천)’는 뜻의 이천군이 됐다.
율진군이 과주가 된 때는 태조 23년(940)일 가능성이 높다. 정 교수는 과주가 규모나 입지로 볼 때 ‘주’의 위상을 갖추지 못한, 이름만의 ‘주’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주변에는 광주(현 하남)·양주(현 서울 광진)·수주(樹州, 현 인천 부평·계양)·수주(水州, 현 수원)·금주(현 서울 금천)·죽주(현 안성 죽산)·견주(현 양주)·포주(현 포천)·행주(현 고양 덕양) 등 여러 ‘주’가 퍼져 있었다.
과주가 왜 ‘주’가 됐는지는 아직 수수께끼다. 당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강력한 토착 세력이나 이 지역 출신의 유력 인물, 남방 원정 때 맡은 역할도 확인되지 않는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과천현의 토성(대대로 살아온 성씨)은 손·이·전·변이고, 사라진 성씨(망성)는 신·안·최다. 정 교수는 이를 근거로 과천에 특별히 힘센 성씨는 없었던 것으로 봤다.
고려의 지방제도 속 과주의 자리
고려는 여러 차례 지방제도를 고치며 나라의 틀을 다졌다. 성종 9년(990) 또는 10년(991)에는 고을마다 별호를 정했는데, 과천의 별호가 부안 또는 부림이다. 이때 별호를 받은 고을은 약 50곳이 확인되며, 금주는 시흥, 양주는 광릉, 포주는 청화, 행주는 덕양, 수주(樹州)는 한남, 광주는 회안, 죽주는 음평, 충주는 대원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성종 14년(995)에는 당나라의 주현제를 받아들여 12주 절도사, 7도단련사, 11단련사, 21방어사, 15자사 등 지방관을 보내고, 전국을 10도로 나눴다. 과주는 관내도(관내동도)에 속한 29주 82현 가운데 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현종 3년(1012) 절도사를 없애고 5도호와 75도 안무사 체제로 바꿨다.
고려 지방제도의 뼈대가 선 것은 현종 9년(1018)이다. 이때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을 두고, 지방관이 있는 주현과 지방관 없이 주현의 관할을 받는 속현의 체제를 세웠다. 당시 주현은 130개, 속현은 373개였다. 과주는 광주목에 소속돼 ‘군’ 급 고을로 취급됐다. 광주목은 천녕군·이천군·죽주·과주 등 속군 4곳과 지평현·용구현·양근현 등 속현 3곳을 거느렸으며, 지금의 경기도 동남부 일대에 해당한다.
과주에 처음으로 지방관이 온 것은 예종 3년(1108) 또는 4년(1109)이다. 이때 8품의 하급 수령인 감무가 과주에 새로 파견됐고, 감무는 조선시대에 종6품 현감으로 바뀌었다. 주변에서는 안산(1108 또는 1109년), 이천(1143년), 금주·용구·죽주(1172년), 양근(1175년)에 감무가 생겼고, 공암에는 1310년 양천현령이 설치됐다.
용산을 내주고, 과천이 되다
고려 후기에는 과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충렬왕 10년(1284) 과주에 속했던 용산처가 부원현으로 승격해 한양에 속하게 된 것이다. 부원현 용산에는 왕이 머무는 용산행궁이 있었다. 충숙왕 12년(1325) 충숙왕의 둘째 왕비 조국장공주는 이곳에서 용산원자(1325~1341)를 낳았다. 공주는 출산 후유증으로 곧 세상을 떠났고, 용산원자도 17세에 원나라에서 숨을 거뒀다. 『고려사』에는 “왕과 공주가 한양에 행차하여 부원 용산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천막을 펼치고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과천’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13년(1413)에 등장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해 10월 15일 조선은 감무를 현감으로 고치고 군·현 이름 가운데 ‘주(州)’ 자가 붙은 곳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 자로 바꿨다. 영주가 영산으로, 금주가 금천으로 바뀐 것처럼 과주도 이때 과천이 됐다.
지도 위에 다시 그린 고려 과주
정 교수는 고려 과주의 영역을 되살리려고 ‘역행법’을 썼다. 가까운 시대의 지도와 행정구역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다. 출발점은 1914년 3월 1일 시흥(금천)·과천·안산을 합쳐 만든 통합 시흥군이다.
1789년 기준으로 조선 후기 과천현은 현내면·동면·상서면·하서면·남면·상북면·하북면 등 7개 면으로 이뤄져 있었다. 1914년 이후 현내면은 시흥군 과천면, 동면과 상북면은 시흥군 신동면, 상서면과 하서면은 시흥군 서이면, 남면은 시흥군 남면이 됐고, 하북면은 옛 시흥군 일부와 합쳐 시흥군 하북면이 됐다.
이를 지금의 지도에 겹쳐 보면 놀라운 그림이 나온다. 현내면은 지금의 과천시와 거의 같다. 동면은 서울 서초구 서초·우면·양재·원지동, 상북면은 서초구 잠원·반포·방배동과 동작구 사당·남현동이다. 하북면은 동작구 동작·흑석·본·노량진동, 상서면은 안양시 동안구 비산·관양동과 평촌 일부, 하서면은 동안구 호계동·평촌 일부와 만안구 안양동, 남면은 군포시 산본·금정·당·당정·부곡동 일대다.
정 교수는 고려 과주의 영역도 조선 과천과 거의 같았을 것으로 봤다. 과주가 과천으로, 금주가 금천으로, 광주가 광주로, 남경(양주)이 한성부로, 용구(와 처인)가 용인으로, 안산이 안산으로, 인주가 인천으로 이어지는 등 고을 자체의 변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1284년 한양으로 넘어간 서울 용산구 원효로·신용산 일대는 예외다.
관아는 어디에… 온온사·과천초 일대가 유력
고려 과주의 행정 중심지인 ‘읍치’에는 여러 시설이 모여 있었다. 수령이 일하는 관아,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사신을 재우거나 잔치를 여는 객사, 향리들이 일하는 읍사(조선시대의 질청 또는 작청), 유학을 가르치는 향교, 읍치 가까이 있는 평지 사찰, 그리고 유사시에 대비한 성곽이 대표적이다. 성곽은 읍치 뒤편의 산성인 배후성과, 큰 고을이나 군사 요충지에 쌓은 읍성으로 나뉜다.
아쉽게도 과주의 관아 자리는 아직 확실한 유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정 교수는 지형적 특징과 다른 지역 사례를 바탕으로 지금의 온온사와 과천초등학교 일대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꼽았다.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현재 자료로 내린 추정이다.
읍치 주변의 절터는 고려 과주의 흔적을 보여 준다. 평지 사찰로는 삼층석탑이 원래 있던 관문리 사지, 석조보살입상이 원래 있던 문원리 사지(문원동 15-166, 문원체육공원 근처), 시기를 알 수 없는 과천동 사지가 있다. 산지 사찰로는 조선 초기의 과천 관악사지, 고려 후기의 연주암 삼층석탑, 나말여초의 육봉 일명사지가 있다.
반면 과주에는 읍성이 없었고, 읍치 뒤편의 배후성도 확인되지 않았다. 정 교수는 이를 드문 사례로 봤다. 관아 터와 성곽을 찾는 일은 고려 과주를 온전히 되살리기 위해 남은 과제다.
오늘날 과천과 서초·동작·안양·군포는 서로 다른 지자체지만, 고려와 조선의 사람들에게는 한 고을이었다. 이웃 도시의 지명 곳곳에 과주와 과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과천의 역사를 지금의 시 경계 안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터뷰] “과주는 이름만 ‘주’였지만, 과천 역사의 뿌리다”
정요근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정요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고려시대 과주는 과천이라는 지명의 기원”이라며 “과주는 규모나 입지상 ‘주’의 위상을 갖추지 못한 명칭상의 ‘주’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고을의 변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려 과주의 영역은 조선 과천의 영역과 일치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요근 교수는 지난 10월 2일 과천문화원 과천시 승격 40주년 기념 특강 ‘과천 역사 바로알기’ 세 번째 강좌에서 ‘고려시대 과주(果州)의 탄생’을 주제로 강연했다. 정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과 국가지명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정요근 교수의 강의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Q. 고려시대 과주를 왜 살펴봐야 하나.
A. 과주는 지금 쓰는 ‘과천’이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과주는 본래 고구려 율목군, 다른 이름으로 동사힐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율진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과주가 됐다. 문헌 기록과 연구 논문, 문화유산을 함께 활용하면 고려시대 과주의 흔적을 찾고 그 역사를 복원할 수 있다.
Q. 옛 지명들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나.
A. ‘동사’는 ‘돗’ 또는 ‘돋’이라는 뜻으로, 산이 많아 지형이 도드라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해가 돋는 곳이라는 뜻도 있다. ‘율목’은 밤나무가 많은 고을인데, 밤나무를 ‘받(산)’과 ‘나미(고개)’로 풀면 ‘높은 고개’라는 뜻이 된다. ‘율진’은 고개보다 나루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름으로 보인다. 노량진·흑석진·동작진이 과천의 나루였다. ‘과주’는 밤에서 과일로 뜻이 넓어진 이름이다. 전통적으로 과천은 산이 많은 지역으로 인식됐다.
Q. 과주가 ‘명칭상의 주’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A. 원래 주와 부는 수도 다음으로 높은 지위의 고을이었다. 그런데 후삼국 통일 전후인 고려 초기에 실제 위상보다 이름만 높은 주·부가 대거 나타났다. 귀순하거나 공을 세운 지역에 대한 포상이나 배려였고, 그 이름이 후대까지 이어졌다. 율진군이 과주가 된 것은 태조 23년(940)이 유력한데, 과주는 규모나 입지로 볼 때 ‘주’의 위상을 갖추지 못했다. 주변의 광주·양주·수주·금주·죽주·견주·포주·행주 등과 함께 생긴 이름이다.
Q. 그렇다면 과주는 어떻게 ‘주’가 됐나.
A. 근거를 알 수 없다. 당대 문헌 기록이 없고, 강력한 토착 세력이나 이 지역 출신 인물도 확인되지 않는다. 남방 원정 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과천현 토성은 손·이·전·변, 망성은 신·안·최로, 유력 성씨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수주)이나 금천(금주), 죽산(죽주), 이천처럼 귀순이나 공신, 고승과 관련된 근거가 있는 이웃 고을과는 다르다.
Q. 고려 지방제도 속에서 과주의 위상은 어땠나.
A. 성종 14년(995) 당나라 주현제를 도입했을 때 과주는 관내도에 속한 29주 가운데 한 곳이었다. 고려 지방제도의 기틀이 선 현종 9년(1018)에는 광주목에 소속돼 ‘군’의 읍격으로 취급됐다. 예종 3년(1108) 또는 4년(1109)에 8품의 하급 수령인 감무가 새로 파견됐고, 감무는 조선시대에 종6품 현감으로 바뀌었다.
Q. 고려 과주의 영역은 어떻게 복원했나.
A. 후대의 공간 정보부터 복원해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행법을 썼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부터 추적해 조선 후기 과천현 7개 면의 범위를 확인했다. 현내면은 지금의 과천시, 동면과 상북면은 서울 서초구와 동작구 일부, 하북면은 동작구 동작·흑석·본·노량진, 상서면과 하서면은 안양시, 남면은 군포시 일부에 해당한다. 과주가 과천으로, 금주가 금천으로 이어지는 등 고을의 변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려 과주의 영역도 조선 과천과 일치했을 것이다. 다만 서울 용산구 원효로·신용산 일대는 1284년 한양으로 넘어갔다.
Q. 과주 관아는 어디에 있었나.
A. 아직 확실한 유적을 찾지 못했다. 지형적 특징과 다른 지역 사례를 참고하면 온온사와 과천초등학교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읍치 사찰로는 관문리 사지와 문원리 사지, 과천동 사지 같은 평지 사찰이 있고, 산지 사찰로 관악사지와 연주암 삼층석탑, 육봉 일명사지가 있다. 과주에는 읍성이 없었고, 읍치의 배후성도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드문 사례다.
[기자수첩] ‘동사힐’에서 과천까지… 이름으로 읽는 과천 1500년

우리가 매일 부르는 ‘과천(果川)’이라는 이름에는 1500년 넘는 역사가 담겨 있다. 고구려의 동사힐·율목, 신라의 율진, 고려의 과주를 거쳐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그 시대가 이 땅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도 함께 드러난다.
정요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의 ‘과천 역사 바로알기’ 강의 자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과천이라는 이름이 걸어온 길을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해가 돋는 산 고을, ‘동사힐’과 ‘율목’
과천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이다. 『고려사』 지리지는 율목군을 ‘동사힐(冬斯肹)’이라고도 불렀다고 적고 있다. 정 교수의 강의 자료에 따르면, ‘동사’는 ‘돗’ 또는 ‘돋’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산이 많아 지형이 도드라진 곳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해가 돋는 곳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율목’은 글자 그대로 풀면 ‘밤나무가 많은 고을’이다. 그런데 정 교수는 다른 해석도 소개했다. 밤나무를 뜻하는 옛말을 ‘받(산)’과 ‘나미(너미·넘이, 뜻은 고개이고 음은 나무)’로 나눠 보면, ‘높은 고개’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과천은 예로부터 산이 많은 고을로 여겨졌다.
나루를 품은 고을, ‘율진’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율목군은 ‘율진군(栗津郡)’으로 이름을 바꿨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율진군은 한주에 속했고 곡양현·공암현·소성현 3개 현을 거느렸다. 곡양현은 고구려의 잉벌노현으로 고려 때 금주(지금의 서울 금천)가 됐고, 공암현은 고구려의 제차파의현으로 그 이름이 고려까지 이어졌다. 소성현은 고구려의 매소홀현(미추라고도 함)으로 고려 때 인주(경원, 지금의 인천)가 됐다.
‘목(木, 나무)’이 ‘진(津, 나루)’으로 바뀐 데 주목할 만하다. 정 교수는 이를 고개보다 나루의 중요성이 커진 결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과천에 속했던 한강 나루로는 노량진·흑석진·동작진 등이 있다. 지금 서울 동작구에 있는 지명들이 옛날에는 과천의 나루였다.
밤에서 과일로, ‘과주’
고려 태조 23년(940), 율진군은 ‘과주(果州 또는 菓州)’로 바뀌었다. 밤을 뜻하는 ‘율(栗)’이 과일을 뜻하는 ‘과(果·菓)’로 넓어진 것이다. ‘주(州)’는 원래 큰 고을에 붙는 이름이었지만, 정 교수는 과주가 실제 규모보다 이름만 높은 ‘명칭상의 주’였다고 설명했다.
고려 성종 때인 990년 무렵에는 과주에 ‘부림(富林)’ 또는 ‘부안(富安)’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별호는 공식 이름과 함께 쓰던 일종의 별명이다. 조선시대 과천현 동헌(수령이 일을 보던 건물)의 이름도 ‘부림헌’이었다. 오늘날 과천에도 같은 이름의 ‘부림동’이 있다.
고려 후기 충렬왕 10년(1284)에는 과주에 속했던 용산처가 부원현으로 승격돼 한양으로 넘어갔다. 지금의 서울 용산구 원효로·신용산 일대다.
‘주’를 ‘천’으로, 드디어 ‘과천’
‘과천’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13년(1413)에 태어났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해 10월 15일 조선은 군·현 이름 가운데 ‘주(州)’ 자가 붙은 곳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 자로 바꾸도록 했다. ‘주’는 큰 고을에만 쓰도록 정리한 것이다. 이때 과주는 과천으로, 이웃 금주는 금천으로, 영주는 영산으로 바뀌었다. 고려의 감무도 이때 현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과천현에 현감이 오게 됐다.
이듬해인 1414년, 과천현은 이웃 금천현과 합쳐져 두 고을의 앞 글자를 딴 ‘금과현(衿果縣)’이 됐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 조선 후기 과천현은 현내면·동면·상서면·하서면·남면·상북면·하북면 등 7개 면을 거느렸다. 지금의 과천시와 서울 서초구·동작구 일부, 안양시 동안구와 만안구 일부, 군포시 일부에 이르는 넓은 고을이었다.
정조의 발길이 머문 과천의 객사도 이 시기 이야기다. 과천현의 객사인 ‘온온사’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지어졌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수원 현륭원에 다녀오는 길에 머물렀고, 이곳에서 편안히 쉬었다는 데서 ‘온온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원래 지금의 중앙동사무소 자리에 있다가 1986년 지금의 자리(과천시 관악산길 58)로 옮겼다.
사라졌다 다시 찾은 이름, ‘과천시’
근대에 들어 과천은 1895년 과천군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과천군은 안산군과 함께 시흥군에 통합됐다. 옛 과천군 중심부의 관문·문원·갈현·하계·막계리는 ‘시흥군 과천면’이 됐고, 나머지 지역은 신동면·서이면·남면·하북면 등으로 흩어졌다. 500년 넘게 이어진 ‘과천’이라는 고을 이름은 면 이름으로만 남았다.
과천이 다시 도시의 이름을 되찾은 것은 신도시 건설 덕분이다. 1979년 경기도 과천지구지원사업소가 생겨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고, 1982년에는 과천지구출장소로 승격됐다. 같은 해 정부과천청사가 들어섰고, 1986년 1월 과천은 마침내 ‘과천시’로 승격됐다. 올해가 바로 그 40주년이다.
동사힐·율목·율진·과주·과천. 이름은 다섯 번 바뀌었지만, 그 안에는 산이 많고 해가 돋는 고을, 밤나무 우거진 고개와 한강 나루를 품은 땅이라는 기억이 이어져 왔다. 과천이라는 두 글자는 이 땅이 걸어온 시간의 지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