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의 옛 지도. 과천이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개발되기 전 농사를 주업으로 한 농촌마을이었다. 사진=송영운

과천시니어신문 창간을 기념, [나의 도시 ‘과천’ 제대로 알아보기]를 연재합니다. 과천시 연혁 및 구성, 인구 구성, 과천이 갖고 있는 공원이나 문화재, 가볼만한 곳, 과천 소재 행정관서나 기업체, 과천에서 오래 살아온 토박이들의 이야기, 과천의 2040비전 소개 등을 시리즈로 소개합니다. 과천시민들이 ‘나의 도시 과천’을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과천문화원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에 걸쳐 44명의 과천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과천, 근현대 역사를 만나다’라는 책자로 2022년 발행했다. 이 내용 중 구독자들에게 들려줄 만한 사례를 소개한다.

과천문화원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에 걸쳐 44명의 과천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과천, 근현대 역사를 만나다’(2022년 발행)라는 책자로 발행했다. 사진=송영운

[이승태(1925년생)]

과천은 주위에 산이 많아 나무장사나 숯장사를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다행히 마차가 있어서 서울역 뒤에까지 가서 팔곤 했다. 애켠삼거리에서 설렁탕으로 식사하고, 거기에서 못 팔면 아현장, 마포까지 돌면서 팔았다.

보통 새벽 2시나 2시반에는 집을 나서서 일찍 팔리는 날은 아침 8시에도 돌아오고 늦으면 저녁 때가 돼서야 집에 오기도 했다.

당시 마차 가득 나무를 싣고 가면 300원을 받았다. 쌀 한가마 값이었다. 마차에 솔가지를 열 단씩 싣고 다녔다. 지게에 지고 흑석동에 가서 팔면 20환, 좁쌀 몇 되 살 돈이 됐다. 가격을 잘 받으면 일당 사흘치 정도는 됐다.

농사짓는 동네는 제철이 지나고 나면 벌판이라 어렵게 살지만, 우리 과천은 나무를 해서 서울로 지고가면 잡곡이라도 사다 죽을 쒀서라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문원동으로 이사를 와서 이장을 맡았는데, 배랭이 본토배기 임모씨가 동네 새마을사업으로 리(理) 사무실을 지으라고 500만원을 줬는데, 턱도 안닿는다. 고생고생해서 100평짜리 사무실을 짓고보니 2750만원이 들어갔다. 할 수 없이 집가진 사람은 1만원, 셋방 든 사람은 3000원씩 걷어서 겨우 마무리할 수 있었다.

[김도경(1934년생)]

갈현동에서 태어났다. 8대조 할아버지대부터 과천에 살았다. 과천초등학교 35회인데, 6학년때 학생수는 100명 정도였다. 남자는 1반, 여자는 2반인데, 여자아이들의 수가 적어서 남자아이들 몇 몇은 2반으로 편성되기도 했다.

6.25전쟁 때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우리 편 군인들이 후퇴할 적에 무전을 잘못 쳐 가지고 아군들이 찬우물 부근 여기저기 길 옆에다가 차를 세워 뒀는데, 갑자기 적군기가 나타나더니 마구 기관총을 쏘아대서 아군 소위가 전사했다. 급하니까 근처에다 묻었는데, 지금 거기에 전사군인에 대한 비석이 서있다. 당시 적군기가 과천에서부터 인덕원까지 아군의 GMC 트럭 수십 대를 다 바숴버리고, 학교나 읍내도 다 태워버렸다.

같은 또래 중 생일이 빠른 친구들은 제2국민역으로 끌려 나가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난 운이 좋아서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고 잘 버티다가 형님 동창분의 도움으로 방앗간을 차려 37년을 먹고 살면서 큰 고생 없이 살아왔음에 감사하다.

[김진우(1935년생)]

아버지가 수원금융조합에 근무하던 시절 수원에서 태어났다. 해방되던 해 아버지가 과천 고향으로 귀농하면서 과천초등학교로 전학해서 졸업했다.

수원에 살 때는 과천 고향집에 오려면 걸어서 지지대고개, 사그네를 거쳐 군포, 안양형무소 근처의 민배기, 인덕원, 찬우물을 거쳐 오곤 했다.

옛날에 ‘서울이 무서우니까 과천서부터 기어간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도 형 친구들이 방학 때 과천으로 놀러 오면, 과천 주막거리에서 건달들이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래서 내 할아버지인 김형만 씨 손자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 과천이 주막거리인데, 남태령 고개 쪽으로 가면 한내삼거리가 있는데 거기도 주막거리다. 남태령 고개를 넘어가면 30여호가 있었는데 거기도 주막거리였고, 또 그 아래로 내려가면 사당사거리가 ‘심방뜰’이라는 동네로 집이 40~50여호 있었는데 거기도 주막거리였다. 즉 주막거리가 4곳이나 줄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울을 가려면 과천을 거쳐야 하고 지나는 곳마다 술을 한순배 내거나 선물을 주어야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명학(1941년생)]

구리안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지금의 3단지에서 청계산 쪽으로 사기막골과 세곡마을 사이를 모템말이라고 했는데, 그 쪽에 청계산에서 내려와 바위 밑에서 나는 옻 우물이 하나 있었다. 물이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 옻이 오른 사람이 이른 아침에 몸을 씻고 물을 떠가면서 돈이나 과일을 놓고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채소 농사를 위한 관정을 파면서 물이 말라버리고 말았다.

1960~70년대 과천에선 채소 농사가 잘 됐다. 커다란 가고(대나무로 짠 대형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시장에서 온 상인들이 실어갔다. 저녁에 상회로 가면 전표를 끊어주고 돈으로 받았다. 채소 농사를 지어 한 해 한 해 땅을 사서 늘렸다. 회사 다니는 것보다 나았다.

그렇게 농사를 짓던 땅이 신도시로 수용되고 나서, 물 좋고 평지인 곳에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평택에 땅을 샀다. 하지만 농사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부동산업으로 나섰다. 집을 지어 팔기도 하고, 상가를 분양받아 임대를 놓기도 하면서 자산을 불려나갈 수 있었다.

[김시환(1944년생)]

과천성당 옆 개울이 흐르는 자리에 다리가 있었고, 집이 몇 채 있었는데, 그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 온온사 앞에 있는 비석이 그 때는 문원리와 관문리 사이에 있었는데, 옮겼다는 것이 기억난다.

지금의 과천동주민센터 옆 커다란 나무도 다른 곳에서 옮겨다 심은 것도 기억난다. 지금도 10월1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그 나무는 6.25전쟁 때는 다섯 명이 들어가 숨을 정도로 큰 나무였다.

삼거리 살다가 결혼하면서 살림을 따로 냈다. 당시 독채의 전세가 20만원이었다. 군대 제대하고 과천으로 돌아와 보니, 새마을 운동이 시작됐다. 군대 가기 전부터 농촌계몽운동인 4-H 운동이 있었고,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빠져 들었다. 그 때부터 동네 일을 맡아 보기 시작했다. 과천시가 시로 승격하고 나서는 통장, 주민자치위원 등 지역 일을 맡아 하게 됐다.

과천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었다. 지금의 부림동 일대에 지어진 아파트는 당시 원주민들의 농지를 수용해서 지어진 것이었다. 농지를 수용당한 원주민들은 대부분 과천을 떠났고, 지금 관문체육공원 인근 부림동 단독주택지역에 대토를 받아 집을 짓고 옮겨와 살았다.

과천에서 수용되고 보상받은 돈으로는 평택 오성면에 땅을 샀다. 벼가 심어진 논을 현물 포함해서 평당 2900원을 주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도 과천 토박이 몇 사람은 오성면 창대리, 안성시 공도면 등에 땅을 갖고 있다.

과천 일대 땅이 수용될 당시, 관문리 일대 논은 4000원부터였다. 돼지 한 마리가 1만8000원이었는데, 지금의 부림동 일대 논은 8000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주거지였던 과천초등학교 인근 지역은 7만원 정도였다.

[안석준(1945년)]

인덕원과의 경계에 있는 갈현리 재경골에서 태어났다. 순흥안씨로 17세기 전반 과천 세거리로 입향한 이후 14대째다.

재경골을 재물 財(재), 지을 耕(경), 해서 농사지어 부자 동네라는 말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샘이 나는 곳이었다. 과천에서는 찬우물과 재경골이 물이 나는 동네였다. 즉, 농사짓기 좋은 물이 있는 곳이었다. 논 2000평은 직접 짓고, 밭은 전부 남에게 빌려줬다. 밭을 빌어 채소를 심던 사람들은 화학 비료를 써서 농사를 하니, 해가 갈수록 소출이 줄어들어 땅을 반납하곤 했다.

그래서 직접 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인분을 사들여 두엄 밭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밭농사를 하려면 물을 퍼 올려야 했다. 몸이 약한 아내가 하루 종일 물을 푸고 나면 밤새 앓았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안양에 나가서 양수기를 사 들여왔다. 동네에서 처음으로 양수기로 농사를 짓게 됐다.

오이 농사가 그렇게 잘 됐다. 아침에 오이를 따고 물 주고 나면, 그 다음 날이면 쑥쑥 자랐다. 아침에 경운기에 가득 싣고 안양 남부시장에 가면, 경매인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현찰을 들려주곤 했다. 오이 농사로 그 해 1000여만원의 빚을 거의 다 갚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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